美 보수 거목 에드윈 퓰너 별세
보수가치 앞세워 의제 설정에 영향
트럼프정부 정책 청사진 수립 주도
대표적 지한파, 韓 200번이상 방문… “전술핵 재배치 열어둬야” 주장도
고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창립자가 지난해 2월 서울 중구 한미협회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미국 보수진영의 유명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을 설립했고, 워싱턴 정가에서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로 꼽힌 에드윈 퓰너 창립자가 18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84세.
이날 케빈 로버츠 헤리티지재단 이사장은 “고인은 단순한 리더를 넘어 비전가였고 건설자, 최고 수준의 애국자였다”며 “우리는 전설을 잃었다”고 추모했다. 다만, 헤리티지재단은 구체적인 사인은 밝히지 않았다.
1941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퓰너 창립자는 1973년 맥주 재벌 쿠어스의 기부금 25만 달러(약 3억5000만 원)를 종잣돈으로 워싱턴에 정책연구소인 헤리티지재단을 공동 창립했다. 이후 1977년부터 2013년까지 최장수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작은 연구소에 불과했던 헤리티지재단을 미국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싱크탱크 중 하나로 성장시켰다. 뉴욕타임스(NYT)는 퓰너 창립자를 “보수주의라는 거대 도시의 파르테논(신전)”이라고 칭했다.
고인은 보수 가치를 앞세워 미국 정치권의 의제 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공화당의 ‘외교안보’ 멘토로 활약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자유시장 경제와 개인의 자유, 강력한 국방을 앞세워 이를 정책화하는 데 앞장섰다. 2016년 미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 당시 후보의 정책자문을 맡았고, 당선 후 1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퓰너 창립자가 주도한 정책 권고를 상당수 받아들였다. 또 헤리티지재단은 2023년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위한 국정 청사진인 ‘프로젝트 2025’ 수립도 주도했다.
한국을 200번 이상 찾았던 고인은 국내 정·재계 인사들과도 가까웠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수차례 만나 한반도 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눴고, 고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 별세 땐 추도사를 보냈다. 2002년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훈했다. 지난해 5월 방한 때는 윤석열 전 대통령을 만났다.
특히 그는 한국 기업의 성장에 관심이 많았고, 재계와 인연이 깊었다. 헤리티지재단 내부에는 ‘이병철 룸’과 ‘정주영 룸’처럼 한국 기업인의 이름을 딴 공간도 마련돼 있다. 고인은 삼성가와 3대째 인연을 이어갔다고 한다. 2020년 11월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을 땐 동아일보에 “1970년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낙천적인 정신이 느껴졌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추도 메시지를 보냈다.
고인은 지난해 11월 미 대선 직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 외교 재개 가능성에 대해 “북한과의 대화는 강력한 억제력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핵 동결’을 대가로 대북 제재를 완화할 가능성에 대해선 “그런 합의를 할 것으로 믿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한미가 한국 내 전술핵 재배치를 포함한 모든 옵션을 열어둬야 한다고 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20일 추도문을 내고 “퓰너 박사는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오랜 친구이자, 아산정책연구원 창립자 정몽준 명예이사장의 40여 년간 멘토였다”며 “그의 지지와 조언은 아산정책연구원 설립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퓰너 창립자와 40여 년간 친분을 맺어 온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이날 성명을 내고 “개인적으로 오랜 친구이자 한미 관계에 큰 역할을 해온 훌륭한 지도자가 우리의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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