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걸어라, 그리고 왕좌에 앉아라 [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코멘트

마크 브래드포드 인터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개인전 ‘마크 브래드포드:킵 워킹’에서 바닥에 설치된 작품 ‘Float’를 배경으로 서 있는 마크 브래드포드.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 ‘킵 워킹(Keep Walking)’이 열리는 서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가면, 전시장 바닥에 넓게 펼쳐진 작품 ‘Float’가 관객을 맞이합니다.

이 작품 옆으로는 골목길을 당당하게 걷는 사람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작품 ‘나이아가라’가 상영되고 있고요.

두 조합은 ‘망설이지 말고 어서 들어와, 그리고 계속 걸어‘라는 메시지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작가의 초청에 따라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파마지와 길거리 전단지를 갈고 닦아 만든 아름다운 추상화들이 관객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방 ‘폭풍이 밀려온다’로 들어서면 휘몰아치는 허리케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경험에 대해 작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브래드포드는 재료를 사용하게 된 과정부터,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의견, 그리고 한국 전시를 준비하며 느꼈던 걱정까지 진솔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인터뷰 전문을 뉴스레터로 보내드립니다.

미용실 파마지를 재료로 한 그림. Blue, 2005. Mixed media on canvas. © Mark Bradford.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 먼저 작가님이 ‘파마지’를 사용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고 싶어요. 언제 처음 그걸 쓰겠다고 생각했는지, 또 그 종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길래 그걸 사용하는지요.

“제가 석사 과정을 할 때인데, 당시 ‘기억’과 ‘재료’에 관심이 많았어요.

내가 유화 물감을 사용한다면, 내 작품이 속하는 역사란 ‘유화 그림의 역사’라고 생각했죠.

물론 그 ‘유화 그림의 역사’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럽 회화 중심의) 미술사죠.

여기에 더해서 사람들은 (흑인이자 미용사의 아들이라는) 제 출신과 성장 스토리에 집착했거든요.

그러니 (파마지라는) 재료의 기원을 생각하며 이걸 전략적으로 쓸 수 있겠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사에 대해 대화를 여는 전략으로 재료를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파마지를 쓰게 된 거예요.”

— 파마지에 담긴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란 어떤 걸까요?

간단해요. 파마지는 파마를 할 때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미용실에서 쓰는 종이죠. 한국 사람들도 파마를 많이 하니까 그 재료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죠.

저는 흑인 여성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인 미용실에서 파마지를 사용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니 내가 속한 사회의 역사와 관련 있는 재료죠.

동시에 저는 미술사, 특히 추상 미술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유럽의 추상과 1950년대 미국 추상이 그것인데. 저에게 그런 추상과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의 자체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어요.

예술가의 고요한 작업실에서 만들어지는 추상화가 세상과는 동떨어진 ‘텅 빈 그릇’과 같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그런 모더니즘의 개념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죠. 전혀요.

— 그러면 파마지를 보고 ‘아, 내가 이걸 재료로 쓸 수 있겠다’했던 정확한 순간은 기억이 나나요?

네, 작업실에 있을 때였어요.

교수님과 크리틱을 하고 있었고, 제가 플라스틱 위에 반투명한 흰색 파마지를 붙였어요.

교수님이 들어와서 봤고,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이게 회화라고 생각해요.”

교수님이 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하고 걸어 나갔어요. 그 순간 생각했죠.

“음, 이거 흥미로운데?”

그때부터 파마지를 재료로 쓰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다녔던 학교(CalArts)는 9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이론을 중시하는 곳이었어요. 유럽 이론이 정점에 이르렀고, 자크 데리다는 신이었으며 할 포스터, 호미 바바, 로잘린드 크라우스… 그러니까 정체성과 이론의 시대였죠. 그런 가운데 제 작업을 보고 어떤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요.

“너 이거 계속하면, 네 커리어는 끝날 거야.”

— 왜 커리어가 끝난다고 했어요?

너무 ‘재료적’(material)이었고, ‘모더니즘 회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뉴욕 화파를 직접 건드렸기 때문이에요.

모더니즘 회화는 잭슨 폴록 같은 커다란 백인 남자들이 그린 추상화이고, 그건 헤테로섹슈얼, 나쁜 남자, 카우보이들의 그림이었어요.

페미니즘을 비롯한 이론의 시대에 폴록 같은 추상화가는 ‘악당’이었거든요.

나이아가라(Niagara), 2005, 비디오, 컬러, 사운드 없음 / 3분 17초. Courtesy of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근데 저는 생각했어요.

“왜 그리면 안 돼? 그 역사를 확장하면 안 돼? 거기로 직접 뛰어들어서 내가 차지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도 카우보이가 될 수 있지. 게이도 카우보이 할 수 있잖아.”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죠.

“아니, 회화는 죽었어.”

그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답한 거예요.

“그래? 회화가 죽었다면 나는 뱀파이어가 되지 뭐.”

파마지를 재료로 한 회화 작품. 믿음의 배신(The Betrayal of a Belief), 2024, 캔버스에 혼합재료Courtesy of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 그러니까 뱀파이어가 될지언정 남들이 다 죽었다는 회화로 승부를 걸겠다. 다만 유럽 미술사의 상징인 유화 물감은 쓰지 않고 다른 재료를 쓰겠다는 거였네요.

맞아요.

회화만큼 ‘재료의 순수성’에 집착하는 매체는 없을 거예요.

지금 작가들이 조각을 전부 대리석으로 만들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요.

그런데 회화에서는 순수성, 위계적 순수성을 고집하죠.

저는 물감을 쓰지 않으면서 내 이야기를 회화사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조각가가 이탈리아 카라라 대리석을 쓰지 않아도 조각사에 들어가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사실 저에게 중요한 건 재료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권력’이에요.

— 그 말은 당신이 ‘유화’를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했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맞아요. 그와 동시에 저는 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것도 추상. 특히 미국 추상.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초대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 1950년대.

세상과의 문을 닫아 버리고 캔버스와 아주 원초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그 개념.(모더니즘) 저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작가들의 작업실 밖에서 마틴 루서 킹은 암살됐고 민권 운동이 일어났어요. 잭슨 폴록이 ‘타임’ 표지에 실릴 때와 같은 시기였죠.

1950년대 미국 추상은 아주 글로벌하게 퍼져 나가서 한국에서까지 볼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

그건 미국 내부가 정치적으로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형상이 없는 추상을 미국의 이미지로 바깥에 보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 추상들이 미국 국경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다 가려버린 거죠.”

바닥 설치 작품 ‘Float’를 가까이서 본 모습. 사진 김민.

— 멀리서 보면 당신의 작업은 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워요.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찢어지고 긁히고 닳아 있는 흔적을 볼 수 있는데요. 혹시 여기에 ‘분노’가 담겨 있나요?

그럴지도 모르죠. 흠, 내가 분노하고 있을까?

사회적인 맥락에서 분노라면 맞아요. 저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특정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화를 내고 있는 게 맞아요.

그러나 예술적으로? 음, 예술적으로는 아니에요.

제 표현이 강렬할 수는 있지만, 작품을 만들 때 분노에 사로잡혀 있진 않아요.

내 작업은 굉장히 육체적이에요. 물리적인 측면이 강하고.

그래서 공격적 에너지가 느껴질 수는 있죠.

하지만 그게 단순히 화가 난 상태는 아니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나는 재료를 내가 원하는 대로 굽히는 데 아주 능숙해요.

이 과정이 공격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요.

미용사라면 고객이 원하는 대로 머리를 반드시 만들어 줘야 하잖아요.

때로는 고객이 원하는 걸 위해서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미용사로 일할 때 그걸 배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보죠. 흑인 손님이 와서 ‘나 백금발로 머리하고 싶어’라고 하면 저는 나무 조각을 주고 입에 물라고 해요.

“백금발을 원한다고? 그래 그럼 이거 물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안 멈출 테니까 아파도 참아야 해.”

이런 식이었죠.

파마지 여러 장을 토치로 그을리고 있는 마크 브래드포드.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 사진

— 저도 곱슬머리라서 무슨 말인지 알아요. 찰랑이는 머리카락으로 만들기 위해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서 참아야 하거든요.

그러니까요.

회화를 할 때도 내가 타고난 본성내가 원하는 욕망 사이의 긴장이 있어요.

저는 곱슬머리 흑인한테 하는 이런 말을 싫어해요.

‘네 원래 머리가 얼마나 예쁜데 바꾸려고 해? 그대로 둬’

아니? 저 여자는 생머리를 하고 싶다잖아. 그냥 닥쳐.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어떻게든 만드는 거예요.

낑낑거리며 그림을 타고 올라가 밀어 넣고 잡아당기면서 애를 쓰죠.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곱슬머리는 곧게 펴진 머리가 되어 있어요.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 2025, 캔버스에 혼합재료Courtesy of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번에 공개한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가 있는 마지막 방이 생각나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낸 느낌? 작가님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요.

그 작품은 아주 층위가 많아요.

자연재해인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있고,
카트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트랜스젠더 여성이 있으며,
필라델피아에서 볼룸 문화를 만든 최초의 드랙퀸 윌리엄 도시,
그리고 나 자신이 있어요.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겁니다.

저는… 모든 역사를 하나로 불러와, 방 안에서 소용돌이치듯 함께 회전하는 힘을 만들고 싶었어요.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 연작의 회화 작품을 가까이에서 본 모습. 사진 김민.

— ‘폭풍이 몰려온다’가 전시된 방에서 저는 윌리엄 도시라는 사람을 세상이 지우려 했지만, 그런 억압이 시간이 지나 더 큰 반작용으로 돌아와 태풍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고 집어삼키는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맞습니다. 정확해요.

사실 이 연작을 뉴욕이나 할렘에서 발표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쉬운 길 같았어요.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허리케인은 예상 못 하는 것에서 불어오는 거니까. 그걸 서울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쩌면 그 허리케인이 바로 저일 수도 있고요.

나, 마크 브래드포드가 서울로 온 허리케인 인거죠.

— 흥미롭네요. 네 그런 허리케인 같은 휘몰아치는 바람이 느껴졌어요.

그걸 느꼈다니 너무 좋네요.

맞아요. 한국인이라고 이걸 이해할 수 있고, 저건 이해할 수 없다. 저는 그런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지역성(locality)을 믿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도 있다고 믿어요.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이 작업을 이해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길거리 전단지를 비롯한 재료를 사용한 작품 Manifest Destiny, 2023. Mixed media. © Mark Bradford.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 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예술가가 되겠다’고 의식했나요?

사람들이 저에게 항상 그 질문을 해요. 그런데 그런 결정적인 순간 같은 건 없었어요.

‘꿈을 따라라’는 식의 말은 중산층이나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생각이에요.

내가 자란 건 그런 환경이 아니었거든요.

나는 밤에 일을 마치고 야간 학교에 가서 미술 수업을 들었어요.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그러한 과정을 거쳤죠.

— 그런데 물감 아닌 재료를 쓴 회화로 승부하려 마음먹었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꿈을 갖지 않았다기엔, 그 말은 세잔이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한 것처럼 야심에 가득한 예술가의 말로 들렸는데요.

그런가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말은 하는데. 스스로 내가 그런 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보다 나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었어요.

난 늘 변두리에 밀려난 사람이었거든요.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 역설적으로 나에겐 어떤 자유가 있었어요.

나 역시 사람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니 자신감 보다는 그런 자유가 내 안에 늘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예술가로 성공했다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그게 때로는 족쇄가 될 수 있어요. 성공할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까요.

마크 브래드포드가 재료로 쓰는 길거리 전단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 사진.

— 당신은 파마지뿐 아니라 길거리 전단지처럼 버려진 재료를 쓰잖아요.

네. 그 버려진 재료를 가져와 회화사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고 있죠.

버려진 것, 주변부로 밀려난 것을 붙잡아다가, 중심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그 버려진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인지도 몰라요.

가난하고, 동성애자이고, 흑인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나의 위치. 하지만 난 결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절대로. 오히려 권력자들이 앉는 식탁(왕좌)에 비집고 들어가 걸리적거리는 걸 치우고 내 자리를 만들려고 했죠.

나에게 추상 회화는 정치적인 행위였고 내가 그걸 하는 이유는 분명했어요. 중심에 앉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왜 여기 앉으면 안 되는데? 반문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네 얘길 듣고 싶지 않아”라고 했습니다.

그럼 난 “그래?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여기 앉을 거야”라고 한 거고요.

전 여자들한테도 항상 ‘제발 먼저 나서서 사과 좀 하지마’라고 해요.

여자들은 테이블에 놓인 생수병 하나를 가져가면서도, “미안한데 이거 마셔도 돼요?” 묻잖아요.

제발 그러지 마. 백인 남자들은 묻지도 않고 그냥 가져가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마시고 싶으면 그냥 집어서 가져가자고요.

나는 권력에 대해 아주 민감한 사람이고, 모든 사람이 왕좌에 앉아 버티며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He Would See This Country Burn if He Could be King of the Ashes), 2019, 혼합재료. Courtesy of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당신이 ‘계속해서 걸어 나가고(keep walking)’ 그 뒤로 폭풍이 밀려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네요.

네. 맞습니다. 제 작품은 허리케인이 오는 것과 같아요.

사실 한국에서 ‘폭풍이 밀려온다’ 연작을 공개하는 건 저에게 불안감을 주는 경험이었어요.

한국의 문화에 대해 내가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이건 흑인 문화에 관한 이야기니까 다르게 읽힐 수가 있잖아요. 그렇지만 아냐, 하자. 그냥 하자. 여기서도 좋을 거야. 라고 생각했죠.

— 전시를 보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후련해요. 가만히 있지 말고 원하는 것을 싸워서 얻어 내라는 메시지가 느껴져서요.

정말요? 그럼 됐어요.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거였어요.

다음 세대의 관객들이 내 작품을 보고 용기를 내는 거요.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반드시 몰려오게 되어 있으니, 그들이 제 작품을 보고 용감해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마크 브래드포드: Keep Walking
- 2025년 8월 1일 ~ 2026년 1월 25일
- 서울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뉴스레터 구독 신청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
#영감한스푼#마크 브래드포드#개인전#킵 워킹#아모레퍼시픽 미술관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