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아름답고 강인한 ‘러시아 발레리노’, 유럽을 홀리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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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중심의 발레 무대에 혁명
예술 기획가 댜길레프 삶 조명
◇댜길레프의 제국/루퍼트 크리스천슨 지음·김한영 옮김/460쪽·3만8000원·에포크


19세기 중반 서유럽에서 남성이 발레를 구경하거나 발레에 참여하려고 하면 놀림과 의심이 쏟아졌다. 영국 런던에서 남성 무용수는 무의미하다고 여겨져 노인이나 익살스러운 캐릭터만 맡았다. 잘생긴 왕자나 청혼자의 역할은 남장을 한 여성 무용수가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남성 무용수는 발레리나를 들어 올리는 역할에 국한됐다. 발레단의 예산을 아끼기 위해 남성 무용수를 버스 운전기사로도 일하게 하자는 논의도 오갔다.

하지만 러시아에선 달랐다. 춤추는 기술은 정확성, 체력, 강인함 같은 전사의 미덕을 보여주는 명예로운 능력으로 여겨졌다. 혈기 왕성한 남자 무용수들이 타이츠를 입고 자유롭게 무대를 누볐다. 군사 훈련, 검술 등 군대 문화 속 춤의 역할과도 비슷했다. 볼쇼이 발레단의 남자 무용수는 붉은 군대 공연단의 무용수와 별 차이가 없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당대 러시아 발레의 차별성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발레단 ‘발레 뤼스’의 흥행 성공을 이끌며 유럽 전역에 이를 소개한 인물 세르게이 댜길레프의 일대기를 조명한 책이다. 영국의 무용평론가인 저자는 발레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댜길레프를 주제로 다양한 연구자료를 찾고 생생한 취재를 덧붙였다.

당대 발레의 변방인 러시아 페름 지역에서 태어난 댜길레프는 천재나 지식인, 이론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1909년 발레 뤼스를 창설한 뒤 예술 기획가로서 빼어난 면모를 보였다. 안나 파블로바, 미하일 포킨, 레오니트 마신 같은 전설적 무용수들을 발탁했다. 그의 연인이었던 바츨라프 니진스키는 ‘발레의 전설’로 꼽힌다.

댜길레프는 발레를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전통적 이분법에 도전했다. 그는 동성애자였는데, 금기시되던 하위문화를 가지고 발레에 새로운 형태의 관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이 발레 뤼스에 열광했고 발레는 주류 예술로 부상했다.

오늘날에도 세계 5대 발레단 곳곳에 발레 뤼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포진해 있다. 여러 흥미로운 일화가 소개돼 발레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쉽게 책장이 넘어갈 것 같다.

#발레#남성 무용수#세르게이 댜길레프#발레 역사#발레 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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