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추방과 배제의 땅에 완성한 그들만의 ‘아름다운 정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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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후 정원 가꾸기 열풍에도 일부 인종-계층은 접근조차 못해
지배 계층 입맛대로 마을 개조한 18세기 영국 ‘대정원화 사업’ 등
정원 속 숨은 계급-정치 문제 다뤄
◇정원의 기쁨과 슬픔/올리비아 랭 지음·허진 옮김/376쪽·1만9800원·어크로스

자로 잰 듯 매끄럽고 아름다운 정원 뒤엔 어떤 희생이 담겨 있는가. 신간은 정원에 얽힌 빛과 어둠, 배제와 공존 등 여러 겹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자로 잰 듯 매끄럽고 아름다운 정원 뒤엔 어떤 희생이 담겨 있는가. 신간은 정원에 얽힌 빛과 어둠, 배제와 공존 등 여러 겹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마치 세계인이 식물과 열병 같은 사랑에 빠진 듯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한 2020년, 영국에선 약 300만 명이 난생처음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종묘 회사는 봉쇄 시작 뒤 첫 3월 판매량이 144년 역사상 어느 때보다 많았다고 한다.

책을 쓴 영국 에세이스트 올리비아 랭 역시 그해 여름 식물과 사랑에 빠진 수많은 세계인 중 하나였다. 랭은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8월 영국 서퍽의 한 주택으로 이사했다. 평생 불안정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온 그는 처음으로 뿌리내릴 거처와 정원을 갖게 됐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꼈다. 방치된 정원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가지치기와 잡초 제거에 몰입했고 잡초로 무성했던 ‘낙원’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책이 정원에 대한 평화로운 에세이로 읽힐 무렵, 갑자기 흐름이 바뀐다. 정원을 돌보던 그의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개인 정원에서 팬데믹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20년 봄 영국 통계청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흑인은 백인보다 정원에 접근하지 못할 가능성이 4배 높았다. 비숙련직이나 반숙련직 종사자, 임시직 노동자, 실업자는 정원에 접근하지 못할 가능성이 전문직이나 관리직 종사자보다 3배 높았다. 랭은 이런 통계를 곱씹으며 덧붙였다.

“봉쇄 조치는 세상의 피난처인 정원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냈다.”

저자는 정원을 사랑하지만, 정원이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는 사유지란 걸 깨닫는다. 때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생계를 희생시킨다는 점도. 그는 “정원 이야기는 그 시초인 에덴동산 때부터 항상 어떤 유형의 식물부터 어떤 유형의 민족까지, 누가 제외되거나 쫓겨났느냐에 관한 이야기였다”며 정원 속에 숨은 계급과 정치로 인식을 발전시켜 나간다.

일례로 ‘풍경(landscape)’이란 단어는 원래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시골 경치를 그린 회화”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점차 일상적인 자연 풍경을 볼 때도 ‘그림 속 회화’ 같은 아름다움을 원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에서 대(大)정원화 작업이 진행됐는데, 당시 상류 지배 계층이 ‘회화처럼 완벽한 정원’을 만들기 위해 자연을 대대적으로 개조했다. 이 과정에서 오솔길과 농장, 때로는 마을 전체를 옮기기도 했다. 랭은 사람들이 주말에 돈을 내고 관람하는 영국에서 아주 유명한 정원 중 상당수가 “그로테스크한 도덕적 공백 위에 세워졌다”는 불편한 사실을 언급한다.

저자는 정원을 가꾸며 자신이 배제와 추방이란 과거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더없이 완벽한 정원을 꿈꾼 것, 식물이 갈색으로 변하면 패배감을 느낀 것 역시 정원에 불순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강박의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암나무 아래 나뭇가지와 죽은 나뭇잎 껍질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조금 지저분한 경계 화단이 완벽한 화단보다 훨씬 비옥하다”는 걸 마침내 이해한다. 저자는 정원을 평화와 조용함, 아름다움의 장소로만 생각하면 놓치기 쉬운 특권과 배제, 착취의 문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한글판 제목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그래서 참 적절해 보인다.

#정원#식물#팬데믹#계급#사회적 불평등#올리비아 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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