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더 친숙한 입자 가속기 이야기[곽재식의 안드로메다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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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LHC 연구 참여 韓 저자
첨단 물리이론 알기 쉽게 소개
◇LHC,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이강영 지음/608쪽·2만9500원·사이언스북스


한국이 입자 가속기 덕에 선진국이 됐다고 하면 어떨까? 과장 섞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입자 가속기라고 하면 물질의 근원이나 과학 이론의 밑바탕을 밝히는 실험에 쓰이는 해외의 대형 장비를 자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입자 가속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바로 브라운관 방식의 구형 TV 속 부품인 전자총이다.

입자 가속기가 기본 입자라는 아주 작고 단순한 물질 알갱이에 강한 에너지를 실어서 원하는 데로 빠르게 쏘아 주는 장치라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구형 TV의 전자총도 입자 가속기다. 작고 성능이 떨어지긴 한다. 그래도 20세기 초 처음 과학 연구에 입자 가속기를 쓰던 옛 과학자들이 본다면 TV의 전자총만 해도 쓸 만한 수준이라고 했을 것이다. TV는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전환기에 수출 산업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제품이기도 하다. 그 시절에는 한국 회사 한 군데에서만 1000만 대씩 전자총이 달린 TV 브라운관을 만들어 전 세계에 공급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은 텔레비전으로 건설된 나라고, 거기 달린 전자총, 입자 가속기로 발전한 나라다.

현재는 좀 더 본격적인 입자 가속기가 곳곳에서 쓰이고 있다. 국내 병원에서 암 치료에 사용하는 방사선 치료기에 소형 입자 가속기가 달린 경우는 매우 흔하다. 최근에는 색다른 방식의 입자 가속기를 도입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안전하고 신속한 수출입을 위해 입자 가속기가 활용되기도 한다. 입자 가속기로 강력한 X선을 만들면 컨테이너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검사하는 일이 가능한데 이런 장비가 부산항 등에 도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이 세계 어느 나라 못잖게 입자 가속기의 나라라고 본다. 만약 대형 입자 가속기를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한 예산이 부족하다면, 실용적인 용도가 많은 소형 입자 가속기 연구에 우선 투자하는 것도 괜찮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중소규모 입자 가속기 연구에라도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해 지식을 공유한다면, 같은 분야의 과학을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력을 더 많이 키워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입자 가속기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정리한 책을 딱 한 권만 추천하라면 역시 이강영 교수의 대표작, ‘LHC,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이다. 이 책은 스위스 제네바에 설치된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입자 가속기, LHC라는 장비를 소개한 책이다. 둘레만 2만7000m에 달하는 거대한 장비를 이해하기 위한 과학 지식을 책 앞부분에서 다루고, 뒷부분에서는 이 기계를 어떻게 개발하고 운영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을 다루고 있다. 모든 이야기가 잘 연결돼 꾹꾹 눌러 담긴 책이기에 입자 가속기 이야기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여기에 한국인 과학자로서 직접 LHC에 방문해 연구를 진행하며 겪은 일들에 대한 저자의 감상과 경험담도 생생하게 녹아 있다. 딱딱하고 밋밋할 수 있는 이야기에 생명력을 더하고 있어 책의 가치를 한 단계 더 ‘가속’하는 느낌이다.

#입자 가속기#방사선 치료기#LHC#이강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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