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의 중년 작가는 자신의 작품 전집을 만들기로 하며 지나온 삶의 기록과 흔적들을 훑기 시작한다. 원고를 정리하다가 외삼촌 댁 창고 구석에서 오래된 가죽 가방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 기억 속 가방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끔 외진을 돌 때 들고 다녔다. 가방을 열자 작가가 사춘기 중학생 시절 끄적였던 편지, 일기장 뭉치가 나온다. 그 안엔 기숙사 생활 당시 1년 아래 남자 후배를 선망하며 끄적였던 문장들이 가득했다.
“세이노의 따뜻한 팔을 잡고, 가슴을 끌어안고, 목덜미를 껴안았다. 세이노도 잠결에 내 목을 세게 끌어안고 자기 얼굴 위에 내 얼굴을 포갰다.”
1968년 소설 ‘설국’으로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작품이 국내 초역 출간됐다. 작품은 저자가 창간한 문예지 ‘인간’에서 1948년 첫 연재를 시작했는데, 문예지의 재정난으로 연재가 불규칙하게 이어졌다고 한다. 1952년에야 출판사 신초샤(新潮社)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을 내며 마지막 연재분을 담아 완결됐다. 2022년 저자의 50주기를 기념해 일본에서 단행본이 출간됐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독자들은 이 내용이 저자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일기인지, 완벽한 허구인지 혼란에 빠진다. 작품은 사실과 허구를 묘하게 오가며 경계를 허무는 사소설(私小説) 형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당대 일본 작가들인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등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문단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동성 후배에 대해 우정 이상의 감정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문제작’으로 거론됐다.
주인공이 “사랑했다”고 표현한 아름다운 후배 세이노와의 이야기 속엔 가족을 모두 잃고 번민했던 한 소년의 성장기가 함께 녹아 있다. 실제로 가와바타 작가는 중학생 무렵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됐다. 섬세한 필치로 유명한 대문호의 색다른 글을 감상하고픈 독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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