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아닌 감상의 대상 수학자 데이비드 가바이(위 첫 번째 사진), 사마르 칸(위 두 번째 사진), 에이미 윌킨슨이 각각 필기한 칠판. 칸은 칠판에 그린 매듭이론 그림이 교차점이나 방향성을 해독하기 어려워 예술적인 시도가 된다고 말한다. 윌킨슨은 칠판과 분필로 하는 수학이 깊이와 형태를 나타낼 수 있는 촉각적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단추 제공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라쿠사가 로마군에 함락되었을 때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모래판에 원을 그리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유명 학자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로마 병사가 그에게 이름을 대라고 요구하자 그는 “원을 밟지 말라”고 대꾸했다가 최후를 맞았다.
오늘날의 수학자들은 모래판 대신 칠판에 분필로 숫자와 도형, 공식을 쓰며 생각을 가다듬고 동료 수학자들과 토론한다. 이 책에 나오는 칠판 사진 중 한 장의 주인공인 위상수학자 제임스 사이먼스는 이렇게 말한다.
“수학자들이 함께 일한다? 대부분 칠판을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칠판은 이내 지워지고 다음 단계를 위한 공간이 마련된다. 결국엔 결론을 내지 못한 사람들이 팻말을 걸고 나간다. ‘지우지 마시오.’”
저자는 미국 뉴욕 패션기술연구소 교수이자 사진작가다. 여름휴가지인 해변 마을에서 수학자 부부와 알게 됐다. 나중에 인도의 한 시골에서 초등학교 칠판에 적힌 수업 내용을 본 그는 수학자 부부가 쓰던 기호를 떠올리며 패턴과 대칭, 구조 같은 추상적 아름다움에 매혹됐다. 이후 하버드대나 프랑스 파리 푸앵카레 연구소 같은 세계의 학술기관을 다니며 수학자가 분필로 쓴 칠판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수학자 110명이 쓰고 그린 칠판과 공식, 도형, 숫자들을 이 책에 담았다. 수학자들이 쓴 짧은 에세이도 곁들였다.
필즈상과 울프 수학상, 아벨상 등 세계 주요 수학상을 모두 수상한 그리고리 마르굴리스는 자신의 칠판에 담긴 공식에 대해 “몇 년째 지우지 않고 그냥 두고 있다”고 한다. “공식이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매번 다시 쓰기 번거롭기 때문이다.”
웃음이 배어 나오는 개인적 사연도 담겼다. 기하학이 전문 분야인 프랑스 수학자 에티엔 지스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칠판을 가까이 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인을 설득해 머리맡에 칠판을 걸어놓았다. “6개월 뒤, 칠판은 제 쓸모를 보여주지 못했고 침대에 분필 가루만 쌓였다. 칠판을 치우자고 하자 아내가 몹시 기뻐했다.”
책을 기획하고 모든 사진을 직접 찍은 저자도 칠판에 적힌 내용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때로는 흰색 분필만으로, 때로는 다양한 색으로, 때로는 숫자와 공식만이, 때로는 복잡한 도형이 있는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인간의 두뇌 활동이 낳은 창의와 신비의 세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기분이 든다.
몇몇 수학자들이 딱 집어 ‘하고로모 분필’을 언급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1932년부터 일본에서 생산된 이 분필은 탁월한 필기감으로 사랑을 받았다. 사장이 회사를 폐업하기로 하자 세계의 수학자들이 이 분필을 사재기하는 현상마저 빚어졌다고 한다. 수학 강사 출신의 한국 분필 수입업자가 사장을 설득해 설비와 경영권을 인수했고, 이 분필은 이제 한국에서 예전과 다름없는 품질로 생산되고 있다.
저자는 칠판이 “수학자의 집이자 실험실이고, 생각에 몰두를 허락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수학자들처럼 칠판과 분필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눌 도구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지금 내게, 우리에게 정리와 공유를 위한 칠판과 분필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을까. 원제 ‘Do Not Erase: Mathematics and their Chalkboards’(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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