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 등 권력자의 ‘작은 방’… 미술작품 외에 보석-무기 등 보관
15~19세기 동서양 수집 문화 연구… 당대 유행-지식 체계화 과정 엿봐
◇호기심과 욕망의 방/이은기 유재빈 지음/424쪽·2만8000원·서해문집
독일 출신의 화가 요한 초파니가 18세기에 그린 그림 ‘우피치의 트리부나’.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희귀한 수집품을 전시하던 공간이자 근대 최초의 ‘미술관’으로 불리는 우피치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트리부나는 우피치의 여러 방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을 모아놨던 공간이다. 권력자들이 과시 용도로 활용했던 수집 공간은 훗날 인문주의와 예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서해문집 제공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군주들은 자신의 궁에 ‘스투디올로’라는 작은 전시용 방을 만들었다. ‘서재’라는 뜻이지만 책을 읽는 장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값비싼 보석과 회화, 조각 등을 배치해 군주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그들이 지적인 것처럼 포장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문주의와 예술이 발달했다고 분석한다.
15∼19세기 동서양의 수집과 진열 문화를 살펴보는 책이다.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 연구자인 어머니와 청나라 및 조선의 궁중회화를 연구하는 딸이 함께 지었다. 서양의 경우 15,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와 16, 17세기 알프스 북쪽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을 살펴본다. 동양은 중국의 오랜 수집 역사를 계승하려 했던 청나라와 한양의 문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조선의 수집 문화에 주목한다.
우피치 미술관 내 트리부나의 현재 모습. 서해문집 제공근대적 미술 작품 배치의 기본을 확립해 ‘최초의 미술관’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는 스투디올로의 발전적 형태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인들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한 메디치가가 만든 공간이다. 미술품은 물론이고 보석, 무기, 지도 등 온갖 희귀한 수집품을 보관했다.
권력자들의 수집품엔 당대 사회의 유행과 욕망이 충실히 반영된다는 것을 보여줘 흥미롭다. 지금은 우피치 미술관이 미켈란젤로나 보티첼리 등 유명 화가의 미술품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18세기까지만 해도 이 미술관이 소장한 회화와 조각은 전체 전시품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당시 유럽에선 미술품보다 야자수 열매 껍질처럼 이국적인 수집품이 더 가치 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수집 후 진열은 뒤엉켜 있던 지식이 체계적으로 분류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신성로마제국의 지배층은 독일어로 ‘경이로운 방’이라는 뜻의 ‘분더카머’에 수집품을 전시했다. 황제 루돌프 2세(재위 1576∼1612년)가 프라하궁에 마련한 분더카머는 특히 화려했다. 첫 번째 방엔 도자기, 두 번째 방엔 지구본과 시계 같은 과학 물품, 세 번째 방엔 보석 상자와 고대 정치인의 초상이 새겨진 금은동 메달 등이 있었다. 무작위로 집합한 물건들을 ‘자연물’과 ‘과학 도구’, ‘가공한 예술품’ 등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수집은 한 나라의 지향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청나라는 중국 고대부터 명대까지 중국 전반의 수집 문화를 포괄하면서도 이민족으로서 다양한 문화를 포용했다. 6대 황제 건륭제(재위 1735∼1796년)는 전통 서화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 회화도 수집했고, 일본과 서양의 희귀품도 모았다. 반면 조선의 책가도(冊架圖·책과 당대 귀중품들을 그린 그림)는 ‘현실과 욕망의 차이’를 보여준다. 저자들은 “조선 문인들의 실제 소장품 목록과 책가도를 비교해 보면 그림에선 조선 백자를 배제하고 중국의 분채자기 등을 많이 그렸다”고 분석했다.
개인의 수집이 문화 발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원론적인 이야기보다는 구체적인 공간과 미술품을 풍부하게 제시해 볼거리가 많다. 과거의 수집 문화가 당대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을 곱씹어 보면, 오늘날 전시 공간에 대한 호기심도 자연스레 생긴다. 책장을 덮은 뒤 근교 박물관에 가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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