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딥페이크 방지’ 선제적 도입
모든 영화-드라마-웹툰에 적용해
“AI 활용, 이용자에 명확하게 고지”
“워터마크 등 표기땐 작품성 타격… 콘텐츠 특성 맞게 시행령 마련해야”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카지노’에서 주인공 차무식을 연기한 60대 최민식 배우(위쪽 사진)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30대로 표현한 모습. 얼굴뿐 아니라 목소리도 아래 주파수처럼 바꿨다. AI 기본법이 적용되면 드라마 화면 오른쪽 위에 ‘AI 활용’이란 워터마크가 붙을 수도 있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에이드리언 브로디)을 받은 ‘브루탈리스트’는 브로디를 포함한 배우들의 헝가리 억양을 AI로 일부 다듬었다(아래쪽 사진). 디즈니플러스·유니버설픽처스 제공영화나 드라마, 웹툰 등 대중문화 콘텐츠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하면 이를 표시하도록 하는 ‘AI 표시의무제’가 내년 1월부터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시행된다. ‘딥페이크’(허위 영상물) 같은 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규제라는 의견과 한국 콘텐츠만 이런 표기를 하면 콘텐츠 경쟁력이 낮아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AI 활용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자는 취지인 ‘AI 기본법’(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관련 법 31조로 들어있는 AI 표시의무제도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AI 관련 법 제정에 적극적인 유럽연합(EU)보다도 빠르다.
이런 법이 마련된 배경에는 ‘AI 활용에 대한 선제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AI를 활용해 창작 과정에서 표절이나 저작권 침해를 막고, 최근 논란이 커진 딥페이크 등 잘못된 사용을 막기 위해 적절한 제동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한 영화 제작자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루탈리스트’가 배우들의 헝가리 억양을 AI로 일부 다듬어 논란이 된 뒤로 출품 요건으로 AI 이용 여부를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안다”며 “AI 활용 공개 여부는 해외에서도 민감하게 논의되는 사안”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AI 기본법에 따르면 영화나 드라마, 웹툰 같은 콘텐츠에서 보조적으로라도 AI 기술을 활용했을 경우에도 이를 알리는 ‘표시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는 점이 논란의 쟁점이다. AI 기본법 제31조는 “가상의 음향, 이미지 또는 영상 등의 결과물을 제공하는 경우 해당 결과물이 인공지능 시스템에 의해 생성됐다는 사실을 이용자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지 또는 표시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아직 어떤 방식으로 AI 활용을 표시할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콘텐츠 업계에선 시청 연령을 제한하는 ‘워터마크’처럼 표기하거나 작품 시작 전에 “AI를 활용해 드라마를 만들었다” 같은 고지문 형태로 공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럴 경우엔 상대적으로 한국 콘텐츠만 이런 표시를 달아 경쟁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세계 모든 콘텐츠가 흔하게 AI를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콘텐츠만 표시 의무가 부과되면 시청자들이 “몰입도를 해친다”며 싫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영화 제작자는 “한국에서 제작한 AI 콘텐츠만 표시 의무를 갖게 될 경우에 작품성이나 흥행에 영향을 받는 게 불가피하다”며 “결과적으로는 약점을 지닌 K콘텐츠가 해외 콘텐츠와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AI 활용이 저예산, 신인 창작자 콘텐츠 활성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있는 만큼, 보다 한국 콘텐츠를 보호할 수 있는 정교한 시행령 제정이 필요하다고 제언하고 있다. AI 기본법 제31조에서 “결과물이 예술적·창의적 표현물에 해당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하는 경우에는 전시 또는 향유 등을 저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지 또는 표시할 수 있다”고 예외 조항을 정한 만큼, 시청자가 콘텐츠 몰입에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시행령을 정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AI 기본법에도 표시 의무에 대한 예외 조항이 포함돼 있는 만큼, 각 콘텐츠 특성에 맞춰서 신중한 시행령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규제 적용 범위를 범죄에 주로 사용되는 딥페이크로 한정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으로 논의될 수 있다. 김용희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재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AI 활용은 위험한 수준이 아니므로 규제의 필요성과 실효성은 면밀히 검토돼야 한다”며 “규제 적용 범위를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목적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로 명확히 한정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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