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원한 ‘희망’의 동사형 찾느라 고민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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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 ‘희망’
이재협 신부 등 한국어판 번역
“힘든 시기, 좋은 안내서 될 것”

이재협 신부는 “교황은 안 써도 무방한, 자신에게 그리 좋지 않은 내용까지 자신이 살아온 길을 진솔하게 책에 담았다”며 “스스로를 ‘지나가는 발걸음’이라고 부를 정도로 겸손하고 소탈한 교황의 모습을 책을 통해 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인생이라는 길에서 누구나 앞이 보이지 않아 방황할 때를 만나지요. 교황도 그런 순간이 있었겠지만 ‘희망’이라는 작은 등불을 피우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셨어요. 모두가 자신만의 희망이란 등불을 켜고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자서전 ‘희망’(원제 SPERA)의 한국어판 번역을 맡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재협 신부는 13일 “교황이 직접 책 제목을 ‘희망’이라고 붙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란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희망’은 1월 중순 세계 80개국에서 동시 출간됐으나, 한국어판은 번역·감수 등의 과정을 거치느라 이보다 늦은 이달 7일 발간됐다. 원래 교황 사후에 출간될 예정이었지만 교황의 뜻에 따라 가톨릭교회가 25년마다 맞이하는 희년(禧年·해방과 안식을 베푸는 해)인 올해 출간됐다. 한국어판 번역에는 이 신부와 지난 5년간 교황청 ‘바티칸 뉴스’ 한국어 번역을 맡은 김호열 신부, 번역가 이창욱, 작가 가비노 김 등이 참여했다.

원제 ‘SPERA’는 이탈리아어 동사 스페라레(sperare·희망하다, 기대하다)의 삼인칭 단수형이다. 교황은 책에서 “희망은 행동을 위한 미덕이자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밝혔다.

“교황께서 명령형으로도 쓰이는 동사 ‘spera’를 제목으로 쓴 것은 ‘희망하라’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의지적 의미를 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통 ‘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하지만, 교황은 반대로 평소 ‘우리에게 희망이 있기에 숨이 붙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예요.”

원제의 의미를 담은 한국어 제목을 찾는 데는 많은 고민이 따랐다. 우리말 ‘희망’에는 동사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 이 신부는 “‘희망하라’ ‘희망을 간직하십시오’ 등 동사형 후보로 20여 가지가 제시됐지만 다소 어색한 데다 늘어지는 느낌이 있었다”며 “그래서 명사지만 결국 가장 직관적인 느낌이 드는 ‘희망’으로 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참고로 영어로 출간된 자서전 제목도 ‘HOPE’다.

이 신부는 “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교황은 2013년 즉위하자마자 첫 외부 방문지로 난민 등 불법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이탈리아의 람페두사섬을 선택했다”며 “이것은 그의 가족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1927년 10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던 여객선이 침몰해 30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부분 생존과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난 소작농, 밀항자, 난민 등이었다. 교황의 조부모도 외동아들(교황 아버지)을 데리고 이 배의 표를 샀었지만, 자산을 제때 처분할 수 없어 배를 타지 못했다. 교황이 수많은 방문지를 제치고 첫 행보로 람페두사섬을 택한 건 이런 배경이 있다고 한다.

이 신부는 자서전에서 감명 깊었던 부분으로는 25장 ‘저는 한낱 지나가는 발걸음일 뿐입니다’에서 ‘희망이 피어나는 데는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라는 구절을 꼽았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고, 여기에 또 다른 당신이 더해지고, 또 다른 당신이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된다는 뜻이지요. 신자, 비신자를 떠나 교황이 살아온 길을 살펴보는 것은 지금 불안하고 힘든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좋은 영적 안내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자서전#이재협 신부#한국어판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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