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기독교 한국 선교 140주년 되는 해. 한국 개신교계는 1885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미국 북감리회)와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미국 북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때부터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기독교는 140년 동안 종교를 넘어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교육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초석이 됐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모습을 정리했다.
1.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근대교육기관 설립
1885년 초기 배재학당 교사.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다. 동아일보DB개신교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발을 디딘 미국 북장로회와 미국 북감리회는 선교 일환으로 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각각 언더우드 학당과 배재학당을 설립했는데 뒤를 이어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 캐나다 장로회 등은 물론 성공회, 구세군 등 군소교파까지도 학교 설립을 선교의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 정동에 문을 연 배재학당(남학교)은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가 됐다. 이듬해인 1886년 5월 서울 정동에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가 여학교인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화학당은 당시 여성 차별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서울에서 미 북장로회가 주도한 교육사업 중 가장 큰 성과는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의 설립. 1912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미국에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고 미국 독지가 스팀슨 등의 기부금으로 현재의 신촌 캠퍼스 부지를 마련했다. 1917년 4월 설립 인가를 받은 연희전문학교는 이후 세브란스 의전과의 통합을 거쳐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2.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의 산실
기독교가 이 땅의 여성 문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기본적 인권 회복에 끼친 영향은 실로 혁명적로, 한국 근대 여성운동은 기독교의 전래와 발전에 거의 모든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 평등사상은 기독교에 앞서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하면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과 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개신교 선교와 함께였다. 복음이 전파된 뒤 감리교에서는 전득삼이, 장로교에서는 한씨 부인이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던 당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여성들은 예수 앞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갇혀 살던 규방 생활에서 나와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예배드리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예배 참석은 여성 교육으로 이어졌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한글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전보다 훨씬 더 당당하게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3. 항일과 독립운동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00여 년 전 이 땅에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6년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883∼1962)가 충남 공주에 세운 기독교 사립학교인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모교. 1914년 12세의 나이로 입학한 유관순 열사는 이곳에서 2년여를 수학한 뒤 엘리스 샤프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진학했다.
1919년 덕수궁 앞에서 벌어진 3·1 운동 만세 시위. 동아일보DB1919년 일본 동경에서 벌어진 2·8 독립선언은 유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들이 중심이 된 거사다. 그 구심점은 동경의 조선 YMCA였고 이 때문에 선언 장소도 YMCA였다. 이후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계 학교와 학생들이 차지한 비중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 등 기독교계 학생들은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과는 별개로 기독교 학교 학생연합체가 주도하는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서울 숭동교회를 회합 장소로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구체적인 단계까지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 계획을 알고 이에 합류하게 된다.
4. 개화의 산실이 된 기독교
1885년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국내에 처음 도착한 인천 제물포항 자리에 세워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동아일보DB선교사들은 수백 년간 내려온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풍속을 개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선교를 위해 지방을 다니던 한 선교사는 “내가 시골 농가에 가서 보니 방 안에 더러운 흙만 붙이고 종이로 도배하지 아니하고, 또 방을 쓸지도 아니하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농부의 집은 정결하게 하면 못 쓰는 게 풍속이다’라고 했다”라며 당시 농촌 실정을 지적했다. 또 “병이 들어 치료하고 약을 쓰는 데도 위생 등 이치는 상관하지 않고 자기 풍속만 지키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런 선교사들의 인식은 이 땅에서 미신, 아편 등을 몰아내고 허례허식에 물든 관혼상제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5. 술, 담배, 아편과의 전쟁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 아편의 폐해를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시작했다.
1895년 장로교회와 1897년 감리교회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금연을 요구했으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위한 윤리적 규칙이기도 했다. 금주·금연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고 새로운 인간상과 국가 건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교회의 금주·금연 운동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 운동 차원을 넘어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술과 담배, 아편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거나 줄이고, 대신 우리 물건 사기 운동을 펼치면 첫째 자신의 건강과 사회적 폐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자본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20년대 들어 교회의 금주·금연 운동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됐는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파의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금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구국 운동과 연결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6. 근대 의료기관의 확대
2019년 복원된 보구녀관 전경. 동아일보DB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처음 시작한 일들은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교육과 의료 부문부터 시작됐다. 영혼의 구원과 함께 육신의 치료에 힘쓰고 무지를 계몽해 새로운 세계를 밝혀주는 게 선교의 첩경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정부의 포교 금지 정책을 완화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설립에 주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병원은 학교에 비해 남녀노소, 신분에 차이 없이 누구나 이용하고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교의 큰 수단이 됐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다. 1904년 9월 설립된 이 병원은 설립 기금 1만 달러를 헌금한 루이스 세브란스의 이름을 땄는데 1909년 세브란스 의학교 인가를 받고, 194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승격했다.1887년 10월 문을 연 보구녀관(普救女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병원이자 여성 의학교육 기관이다. 보구녀관은 ‘모든 여성을 위한 병원’이란 뜻으로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메타 하워드 선교사를 비롯한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진료에 나섰다.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이화의료원의 전신으로 보구녀관은 진료 외에 의료 선교와 의학교육, 간호교육에도 매진해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와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 김마르다를 배출했다.
7. 우상과 미신의 타파
초기 선교사들에게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미신과 우상 신봉 문화는 그 고유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바꿔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알렌은 ‘한국의 풍습, 무당’이란 글에서 당시 미신과 관련된 모습을 이렇게 서술했다.
“서울의 밤은 매우 조용한데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 중 하나가 무당이 내는 소리다. 무당의 말을 믿는 사람은 대부분 하층민이다. 사용하는 도구는 장구, 심벌, 구리 막대기, 징, 바구니, 우산, 부채, 인형 등이며 이 중 바구니는 콜레라에 걸린 사람의 몸에 쥐가 있다고 믿고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 긁는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무당은 사용하는 도구나 인형 등을 결정한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한국의 일상이 돼 버린 우상과 미신을 보면서 이런 현실을 시정하고자 했다. 이런 일 역시 교육이나 의료 활동을 통해 점차 시정될 수 있을 것으로 봤고 이의 타파를 계몽하고자 했다.
8. 노비와 백정의 해방
계급 타파와 평등의 이상 실현에서 교회의 백정(白丁) 해방운동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도 없다. 이들은 호적에서 제외된 천민 계급으로 가장 비천한 하층 구성원이었다. 비록 갑오경장(1894년)으로 제도상 신분적 평등이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오랜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교회가 이런 상황에 관심을 보인 것은 1895년 4월이었는데 서울 곤당골 장로교회(승동교회) 무어 선교사(1860∼1906)는 조정에 보낸 진정서를 통해 백정들의 가련한 상태를 낱낱이 알리면서 비인도적인 천대를 막아달라고 건의했다. 이런 노력으로 같은 해 5월 전국에 백정에 대한 신분 해방과 갓 착용 허용을 알리는 방이 붙었고 승동교회에는 6명의 백정이 입교했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백정이었던 사람이 양반 신자들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 장로교 선교활동으로 전국에서 입교한 교인이 200여 명에 불과하던 시절에 6명이나 되는 백정의 입교는 그 자체로 큰 진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회의록이나 문서 등에 이런 백정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한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식은 이후 실질적인 신분 타파 사회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됐다.
9. 한글의 보급과 재발견
선교사들은 한글을 보급하고 대중화시키는 데도 힘을 썼다. 교회에서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경을 보급해야만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인 중에 한문으로 성경을 보는 이도 별로 없고, 더구나 국문으로 보는 이도 몇이 못 된다. 금년부터는 주일 오후마다 국문 공부를 착실히 한다 하니 성경의 뜻을 많이 깨닫고 영혼의 양식을 넉넉히 만들기에 유조할 뿐더러 문자상에도 유식한 사람들이 되겠더라’ (1902년 5월 경기 남방지역의 한 교회 통신 중)
교회의 성경을 통한 한글 보급은 결과적으로 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 상당수는 배움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부녀자들이었다. 당연히 성경 보급도 크게 늘었는데 1886년까지 1만5690권이던 성경 보급은 1887년 한 해에만 6600권이, 1892년까지는 57만8000권이 보급됐다. 이런 분위기는 1893년 성경의 번역과 출판을 담당하는 기구인 대한성교서회 창설로 이어졌다.
10. 출판 문화의 보급
1885년 한국지부를 설치한 대영 성서공회가 1936년까지 이 땅에서 출판한 성경은 무려 1807만9466권에 이른다. 전체 국민이 2000만 명 남짓하던 시대에 성경 출판 1800만 권이란 숫자는 기독교가 이 땅의 출판문화에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 선교에서 출판과 인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1885년 아펜젤러, 스크랜튼 선교사 등을 파견한 미 북감리교 선교부였다. 북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에서의 출판 사업을 위해 1887년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올링거 목사(1845∼1919)를 파견했다. 그는 영어, 한문, 한국어를 인쇄하는 삼문출판소를 설립하고 기독교문서협회도 창립해 초대 회장이 됐다. 1892년 그가 월간지로 간행한 ‘Korean Repository(한국 지식·정보 보관소)’는 당시 한국 사정을 과학적·문헌적으로 제공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자료이기도 했다.
올링거 목사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서적 출판의 역사는 이후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로 이어졌고, 이후 국내외 종교인들과 신자들이 각종 출판사를 설립하고 서적을 출간하며 기독교를 넘어 한국 출판문화로 성장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어려운 이와 함께 한 140년
11. 사회복지 사업의 초석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 전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지역과 사회를 위한 복지 사업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한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정신이다. 이런 활동은 개화기, 일제강점기는 물론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엘림복지타운 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은 1984년 21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000여 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줬다. 대상 국가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등으로 확대됐고 특히 지난해 7월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 용사의 손자 테카렌 메릿 베주아엣(7세) 어린이를 포함해 5명의 어린이가 무사히 수술받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 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은 불우청소년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 약 6만6000㎡(2만여 평)의 부지에서 500여 명의 불우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직업 교육을 제공하고 200여 명의 무의탁 노인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복지시설이었다. 1988년 경로원과 직업전문학교로 시작한 엘림복지타운은 1994년 선교원, 1997년 요양원을 개원했다.
2012년 2월 굿피플 지원으로 주택 70가구와 정화조 7개가 준공된 필리핀 마니바악 마을을 이영훈 목사(가운데)와 굿피플 관계자들이 걷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한국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YMCA)는 일제강점기 민족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선, 오래된 시민단체 중 하나.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시민단체의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인 1903년 영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 들여왔는데 당시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불리며 개신교와 서양 문화 유입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단체를 통해 이 땅에 야구, 농구, 배구, 수영이 들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1910∼1912년 YMCA 간사로 재직하며 교회 설교, 성경연구반 인도, 전국적인 YMCA망 구축, 번역 사업 등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YMCA와 인연을 맺었는데 이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정신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부마민주항쟁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YMCA 이사와 시민중계실 법률 자문을 맡기도 했다. YMCA가 일제강점기, 군사독재 시절에도 재야 운동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YMCA가 외국인 선교사와 사제들이 활동하는 국제단체라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백한 기독교 단체기에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게 흔히 덮어씌웠던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13. 새 나라의 기틀을 만들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첫 국회인 ‘제헌 국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개회됐다. 옛 중앙청 회의실에서 198명의 의원이 참석했는데 당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의 이 일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목사인 이윤영 의원의 기도가 이어졌다.
우리나라 첫 헌법인 제헌헌법에 예수 그리스도 정신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사상이 반영된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14. 공산주의를 막는 방패가 되다
절대적인 존재를 믿는 기독교와 신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애초부터 양립 불가능한 관계였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을 인정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계는 6·25전쟁 당시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고 교회가 불태워지는 엄청난 피해를 겪었다.
60여 명의 전 교인이 신앙과 자유를 지키려다 인민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는 이런 역사의 산증인. 야월교회는 광주·목포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 미국 남장로교회 유진 벨 선교사(1868∼1925)가 1908년 설립한 곳으로 그의 사위인 윌리엄 린턴 선교사는 인요한(존 린턴)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조부이기도 하다. 인근 염산교회도 전쟁 당시 77명의 교인이 순교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염산교회를 이끈 김방호 목사는 교인들이 피란을 권했으나 “목사가 어떻게 교회와 성도를 두고 다른 곳에 가느냐”라며 남아 있다가 변을 당했다.
이런 사례는 전쟁 당시 전국에 걸쳐 무수히 많이 벌어졌는데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라는 인민군의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성도들의 신념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15.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 ‘희망’을 일깨운 지도자들
고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은 한국 교회 부흥과 궤를 같이한다. 특히 전쟁 후 폐허가 된 극빈국 대한민국 국민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일으켜 세운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1958년 서울의 변두리인 은평구 대조동 깨밭에서 천막 교회로 출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2년에 이르러 성도 수 70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했다.
조용기 목사는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고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나에게도 큰 힘이 됐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힘이 국민적 용기와 희망으로 승화해 산업화의 원동력이 됐고, 오늘 선진국의 밑거름이 됐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평이다.
지난해 7월 ‘제13회 인구의 날’ 기념식에서 저출생 극복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이영훈 담임목사(오른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여의도순복음교회는 2대 담임목사인 이영훈 목사가 부임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용기 목사가 강조한 희망의 목회를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신앙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성도들에게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랑 실천과 봉사의 가치를 강조하는 성숙의 길로 나아갔다. 이 또한 갈등과 경쟁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희망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6.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202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해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진행한 ‘한국교회의 한국 사회 기여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해방 전은 ‘항일 민족 운동(85%)’, 해방 후는 ‘민주화운동(57%)’을 가장 큰 기여로 꼽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가 이 땅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바가 큰데 그 상징 중 하나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한국기독교회관이다.
1970년 1월 문을 연 한국기독교회관은 명동성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불리던 재야 운동 세력의 구심지. 1970년대 초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한국기독교학생총연합,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등의 단체들과 진보적 성향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이곳에 입주해 민청학련사건 구속자들의 석방 운동과 목요기도회 등을 전개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76년 3·1 민주 구국 선언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농성, 1980년 5월 서강대생 김의기가 투신자살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
17. 통일을 꿈꾸며 북한 지원에 나서다
2023년 11월 평화통일연대가 주최한 ‘한국교회 초청 화해와 평화, 평화통일을 위한 포럼’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북한 지원 규모는 국내 대북 민간 지원단체 지원 총액의 7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남북 관계 경색 국면에서도 ‘남북 평화 구축의 조성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평양 봉수교회에서 평양심장병원 착공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고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평양 심장병원 건립 추진은 인도적 지원은 물론이고 남북통일이라는 더 큰 꿈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의 걸음이다. 1984년부터 국내에서 심장병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온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의 심장병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고 치료하기 위해 2007년 12월 평양 중심부에 3만3000㎡ 규모의 심장병 치료 전문 종합병원을 착공했다.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이 병원은 안타깝게 2010년 3월 북한에 의한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공사도 중단된 상태. 남북한 민간 교류의 상징이었던 평양심장병원은 현재 7층 건물의 골조 공사만 끝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남북 관계가 회복돼 병원이 완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병원이 완공되면 북한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와 함께 남북 평화공존과 통일을 앞당기는 중요한 역할 해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8.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와 교회 역사는 국가와 국민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나선 희생과 봉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금식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또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세월호 참사, 코로나 팬데믹, 이태원 참사, 지진과 산불 등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지원금을 보내고, 직접 사고 현장을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피해를 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 10억 원의 긴급 구호헌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한 것은 그 작은 예 중 하나. 구호헌금은 경북 의성군, 안동시·청송군·영양군·영덕군을 비롯해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 울주군 등 산불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을 위해 사용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20년 코로나19 대구·경북 지역 확산 당시에도, 2023년 튀르키예 대지진과 이태원 참사 때도 각각 10억 원을 지원했다.
19.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한국 기독교계의 해외 선교와 봉사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예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만든 국제구호 NGO ‘굿피플’이다.
대사회적 구제 사업을 더 전문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1999년 7월 설립된 ‘굿피플’은 2005년 파키스탄 지진, 2008년 미얀마 사이클론 재해, 2011년 일본 대지진, 2023년 시리아 강진 등이 발생했을 때마다 긴급 구호단을 파견해 재난 구조와 인명 구조, 의료봉사 등 사업을 전개해 왔다.
굿피플의 해외 지원 사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전개됐는데 보건소 건축 및 운영, 보건의료 전문 인력 양성, 건강검진 및 의약품 지원 등 보건 분야에만 무려 156만7000여 명이 혜택을 받았다. 학교 기숙사와 도서관, 아동센터 건립,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장학금과 급식 지원, 전문교육 커리큘럼 구축을 통해서는 9만9800여 명이 도움을 받았고, 우물 등 정수 센터와 정수시설, 상수도, 화장실 설치 등으로 5만5400여 명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됐다.
20. 저출생 극복으로 미래를 세우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국가와 미래세대를 위해 가장 역점을 두는 활동은 ‘저출생 극복’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12년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매년 출산장려금 지원을 시작했다. 결혼격려금, 미혼모 자립 지원 등 지금까지 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을 위해 지원한 금액은 800억 원이 넘는다. 정부 기관도 아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에 앞장서는 이유는 국민이 없으면 교회도 존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 이영훈 목사는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2명대에서 1명대로 급격히 떨어지는 걸 보면서 이러다가는 국민이 사라져 국가가 소멸하는 날이 오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라며 “저출생 문제 해결은 국가는 물론이고 교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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