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두운 곳의 이야기를 밝은 곳에 꺼내는 게 나의 사명”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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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이 지랄맞음이…’ 14쇄 화제
시각장애인 작가 조승리 신간 펴내… “7년 눈이 돼준 활동지원사에 헌정”
“주변에 색을 물으면 분홍-보라 다양… 난 그중 겹치는 색으로 받아들이죠”

15일 신간을 든 채 웃고 있는 조승리 작가. 시각장애인인 그는 첫 책이 나왔을 때 특히 시각장애인 동료들이 자기 일처럼 자랑스러워했다고 했다. “초반에는 (오디오북 없이) 종이책만 나왔거든요. 이분들은 볼 수 없는 책이잖아요. 그런데도 사시더라고요. 지금은 냄비 받침으로 쓰신다더라고요(웃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5일 신간을 든 채 웃고 있는 조승리 작가. 시각장애인인 그는 첫 책이 나왔을 때 특히 시각장애인 동료들이 자기 일처럼 자랑스러워했다고 했다. “초반에는 (오디오북 없이) 종이책만 나왔거든요. 이분들은 볼 수 없는 책이잖아요. 그런데도 사시더라고요. 지금은 냄비 받침으로 쓰신다더라고요(웃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세상이 너무 궁금해요. 어떻게 변했을지. 그동안 못 본 세상이 너무 궁금해요.”

열다섯 살 때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해 지금은 낮과 밤만 겨우 감지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 조승리 작가(39)의 말이다. 하지만 15일 서울 동작구 한 카페에서 이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서 낙담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신파는 질색”이란 말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이다.

조 작가가 지난해 낸 첫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달)는 ‘깜짝’ 14쇄를 찍으며 출판가에 화제를 몰고 왔다. 그가 기세 좋게 1년 만에 신작 에세이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세미콜론)을 최근 냈다. 175cm 훤칠한 키의 조 작가는 담당 편집자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은 채 걸어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 어색한 기색도 없이 ‘잇몸 웃음’을 발사했다.

“제가 옷을 사러 가면요. 일단 더듬어 봐요. 손에 닿는 촉감으로 상상해요. 거기서부터 물어보기 시작해요. 이 레이스는 무슨 색이야? 전체적으로는 무슨 색이야? 빨강은 쨍한 빨강이야 아니면 어두운 빨강이야?”

그가 질문이 많은 건 그렇게 수집한 감각들의 교집합이 곧 자신의 관점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티셔츠를 두고도 어떤 사람은 보라색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분홍색이라고 해요. 같은 미술품인데도 누구랑 보느냐에 따라서 관점이 다르고 다른 이야기를 해줘요. 그래서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면서 같은 걸 물어볼 때가 있어요. 그 안에서 나만의 상상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아요.”

책 속엔 독자의 감각을 일깨우는 사례가 가득하다. 작가의 일터는 마사지숍. 손님의 몸에 밴 파스 냄새와 해장국 누린내로 고된 삶을 짐작하고, 여행으로 간 백두산 천지에선 인파의 감탄으로 눈앞의 풍광을 감각한다. 나프탈렌 냄새가 밴 지폐 한 장으로 상대의 가난과 고독을 헤아리는 장면에선 탄식이 나온다.

그는 금·토·일요일 주 3일 마사지숍으로 출근하고 나머지 4일은 글을 쓴다. 점자 전자 단말기로 초고를 쓴다. 이 단말기로는 행갈이를 하거나 오타를 잡아내는 게 어려워 다시 PC로 옮겨서 작업하곤 한다. 퇴고할 땐 다시 점자 단말기를 손으로 만지거나 음성 프로그램으로 소리로 들으며 퇴고한다.

더딜 것 같지만 아니다. 다음 달에만 신간 두 권이 예정돼 있다. 문학동네 ‘월급사실주의’ 앤솔로지와 자전적인 연작소설이다. 그 뒤엔 일본 추리소설가 와카타케 나나미처럼 사회파 추리소설을 쓰고 싶단다. 조 작가는 “가장 어두운 곳의 이야기를 밝은 곳에 꺼내 놓는 게 내 글쓰기의 사명”이라고 했다. 이번 신간에 소개한 한 에피소드에서 그는 자신을 코앞에 두고 ‘저런 사람들’이라고 지칭하는 식당 주인 앞에서 어깨를 곧게 펴고 국을 떠먹으며 다짐한다. “당신들이 말하는 ‘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써야지.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거야.”

첫 책이 복지관 산문 교실 은사인 박현경 동화작가에게 헌정하는 책이었다면, 이번 책은 7년 넘게 눈이 돼준 활동지원사 수미 씨에게 헌정하는 책이라고 했다. 그는 “조금 오버일 수도 있는데 어머니 같은 분”이라며 “저를 처음으로 자랑스러워한 분이었다”고 했다. 눈시울이 붉어질 즈음, 그는 “어머, 나 주책 떤다. 수미 씨 얘기 이제 그만해. 금지어”라며 까르르 웃었다. 다람쥐가 나무 위로 올라가듯 재바른 웃음이었다. “신파는 질색”이라는 사람다웠다.

#시각장애인#조승리#에세이#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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