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화려한 듯 절제된 멋, 日 미학의 뿌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4월 19일 01시 40분


코멘트

◇도쿄 미학/최태화 지음/288쪽·1만8000원·책과함께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의 전투 장면은 싸움이라기보다 하나의 춤에 가깝다. 검 끝에서 수묵화처럼 물결이 흐르고, 화염이 피어오르며, 인물들은 화려한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싸운다. 과장된 몸짓과 선명한 색채 안엔 묘하게 절제된 기품이 흐른다.

국립군산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감각을 일본 전통 미학인 ‘이키(粋·세련되고 절제된 멋)’로 설명한다. ‘이키’는 에도 시대(1603∼1868) 도시 서민, 특히 상공업자 계층이 만들어낸 미의식이다. 화려하되 가볍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여운을 남긴다.

‘이키’는 유곽과 가부키(歌舞伎) 극장에서 피어났다. 유곽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아닌 사랑이 오가는 공간, 가부키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연기가 펼쳐지는 무대였다. 이 비일상의 공간에서 감정과 욕망, 아름다움이 뒤섞였고 그 속에서 ‘이키’는 삶의 태도이자 도시인의 감각으로 자리 잡았다.

1868년 근대화를 추진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전통 감각을 점점 배제했다. ‘이키’는 낡은 정서로 밀려났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일본은 다시 이 감각을 꺼낸다.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서 선보인 공연이 그 상징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동작, 단정한 옷매무새, 울림 있는 리듬을 앞세운 개막식 공연은 ‘이키’의 현대적 표현이자 일본이 다시 꺼내든 감성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일본 정부는 최근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국가 브랜드 전략인 ‘쿨저팬’을 내세워 전통과 첨단을 잇는 브랜딩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모던 이키즘’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탄생하고 있다.

일본 문화 전문가인 저자는 문학과 영화,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이키’라는 감각의 흐름을 촘촘하게 짚어낸다. 일본이 오래된 미의식을 되살려 정체성을 재정비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에 이르게 된다. 한국은 한류의 다음 단계를 어떤 감각으로 이어갈 것인가. 단순히 ‘잘 만든 콘텐츠’를 넘어, 그 안을 채울 우리만의 미학과 정서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본 전통 미학#이키#에도 시대#메이지유신#모던 이키즘#쿨저팬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