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일우중 ‘고흥’감래[여행스케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24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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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김훈 작가가 지인이 자그마한 집을 짓고 있는 전남 고흥군 바닷가를 찾았다. 바다를 등지고서 집을 보곤 “개집이구먼” 하던 김 작가가 돌아서 바다를 향했다. 이내 그가 말했다고 한다. “절경이다.” 기자가 고흥으로 향한 이달 15일, 봄비답지 않게 거센 비가 쉼 없이 내렸다. 어둡게 가라앉은 하늘 아래 둔탁한 빗방울들을 받아 끓며 넘치는 바다는 그 절경을 허락할까.

● ‘섬이 산이고, 바다가 하늘이더라’

쑥섬은 로켓 발사로 유명한 섬 외나로도에서 배로 2분 거리에 있다. ‘쑥 애(艾)’ 자를 써서 애도라고도 부르는데, 쑥이 많아서가 아니라 질 좋은 쑥이 나서 그렇다. 나로도여객연안터미널에서 우비에 우산까지 쓰고 12인승 배에 올랐다. 며칠 전 배가 증편돼 이제 두 척이 오간다.

나로도가 삼치를 주로 잡는 안강망(鮟鱇網·긴 주머니 모양 통그물) 어업으로 흥청대던 1970년대까지 쑥섬은 고흥에서 제일 부자마을이었다고 한다. 현재 12명밖에 살지 않지만 많을 때는 500여 명이 살았고, 대부분 가구가 안강망 배를 보유했다. 외지에서 배 타러 온 사람들이 많아 셋방이 없을 정도였다.(‘섬문화 답사기-여수 고흥 편’, 김준 지음, 보누스, 2012)

고흥군 쑥섬 꼭대기 ‘별 정원’으로 향하는 원시림 어둑한 길을 가다 마주친 빛. 저 너머 바다가 언뜻 보인다.
고흥군 쑥섬 꼭대기 ‘별 정원’으로 향하는 원시림 어둑한 길을 가다 마주친 빛. 저 너머 바다가 언뜻 보인다.
지금 그곳으로 향하는 까닭은 쑥섬에 정원이 있어서다. 나로도에 사는 중학교 교사 남편과 약사 아내가 약 20년 전, 노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머리를 맞댄 결론이 정원이었다. 그때부터 칡넝쿨 얽힌 땅을 조금씩 사서 개간해 꽃나무를 심었다. 2016년 전남 민간정원 1호로 개방했다. 뱃삯에 정원 입장료 6000원을 받는다. 처음에는 ‘양심통’만 놓아뒀다고 한다.

쑥섬이 머리에 이고 있는 ‘별 정원’에서 바라본 바다. 봄비답지 않은 빗속에서 바다와 하늘 모두 연회색 빛으로 하나가 된 듯하다. 멀리 사양도(왼쪽 섬)와 내나로도(오른쪽 섬)를 잇는 다리는 사양교다.
쑥섬이 머리에 이고 있는 ‘별 정원’에서 바라본 바다. 봄비답지 않은 빗속에서 바다와 하늘 모두 연회색 빛으로 하나가 된 듯하다. 멀리 사양도(왼쪽 섬)와 내나로도(오른쪽 섬)를 잇는 다리는 사양교다.
그 ‘별 정원’은 쑥섬이 머리에 이고 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어둡다. 대나무와 푸조나무와 육박나무와 돈나무 등이 간섭 없이 자라 하늘을 가린 데에다 비까지 내리니…. 맑았어도 그 길은 난대(暖帶) 원시림 틈에서 빛과 바다를 찾는 길이었을 게다. 긴 세월 자유롭게 뻗고 용틀임한 가지와 옹이들은 말(馬)을, 코알라를, 사람 형상을 지어냈다. 해발 83m, 구불구불 약 900m 길. 깊지 않은 산속이 장맛비를 연상케 하는 습기에 더 어둑어둑하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빛이 흐린 사선을 그으며 발치에 떨어진다.

풀죽은 사람을 격려하려는 것인지 짧은 탄성을 발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다. 흐린 빛이 온몸에 와닿고 시야가 트인다. 깎아지르며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에 사람 얼굴 바위들이 보이고 그 밑 해변에는 인어가 누워 있는 듯하다.

‘젖은 숲이 뿜어내는 젖은 향기’를 맡으며 다다른 정원은 별세계(別世界)다. 우산 아래 빙 둘러보니 색색의 꽃들 저 너머로 연회색 빛이 바다와 하늘을 하나로 만든다. 섬이 곧 산이 되고 바다는 곧 하늘이 된다. 6월 어느 맑은 날, 수국이 색의 향연을 펼칠 때 다시 찾으리라 생각하며 길을 내려온다.

● 삶을 품은 갯벌

전남 장흥 출신 한승원 작가는 남도의 섬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전남은 머리에 해당하고 그 남쪽 섬들은 한반도 머리카락에 해당한다. 머리에는 영혼이 들어 있는 뇌가 있는데, 뇌를 보호하는 머리카락은 하늘의 오묘한 뜻을 감지하는 안테나 역할을 한다.’(‘섬문화 답사기-여수 고흥 편’)

쑥섬이 헤아린 천심(天心)은 무엇이었을까. 보성 장흥 완도까지 품고 있는 득량만(得糧灣) 가장 안쪽에 있는 우도로 향한다. 물이 빠져 바다가 속살을 드러내면 뭍에서 우도까지 약 1.3km 되는 길이 열린다. 하루 두 번, 대여섯 시간씩이니 하루의 반은 육지, 반은 섬이다. 길은 오래전 사람들이 10년 넘게 몽돌을 깔아 만들었다. 40여 년 전 시멘트 포장을 해서 차도 다닐 수 있다. 그전에는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도 많았다.

차를 타고 그 길을 달린다. 양옆은 굴, 꼬막, 바지락, 게가 천지인 너른 갯벌이다. 우도로 오기 전 잠시 들렸던 바닷가 카페 앞도 개펄이 드러났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아낙네 서너 명이 ‘뻘배’를 타고 참꼬막을 캤다. 참꼬막은 예부터 이웃 벌교로 가서 팔린다. ‘벌교 꼬막’ 상당수가 ‘고흥 꼬막’이다.

뻘은 갯벌이다. 널배라고도 하는 뻘배는 길이 2m, 폭 45cm 정도로 앞부분을 45도 안팎 구부린 널빤지다. 김준 전남대 학술연구교수에 따르면 뻘배를 타지 못하면 사람 구실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고흥 남열해돋이해수욕장 등의 서핑 인구가 적지 않다. 노고의 정도를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뻘배는 ‘갯벌 서핑보드’처럼도 보인다.

우도 포구에는 물이 차기를 기다리는 배들이 여러 척 묶여 있다. 물이 들이차면 자망(刺網)을 실은 배들은 홋줄을 풀고 만선을 꿈꾸며 득량만으로 나아갈 터다.

전남 고흥군 득량만 깊숙한 곳에 있는 섬 우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레인보우교’. 그 아래로 물이 빠진 갯벌을 가로질러 뭍으로 가는 길이 드러났다. 레인보우교는 사람만 다닐 수 있다.
전남 고흥군 득량만 깊숙한 곳에 있는 섬 우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레인보우교’. 그 아래로 물이 빠진 갯벌을 가로질러 뭍으로 가는 길이 드러났다. 레인보우교는 사람만 다닐 수 있다.
김 작가는 뭍과 섬을 잇는 노둣길을 두고 ‘물이 차오르면 징검다리는 잠기지만 그 물 밑에 다리는 있다’고 했다.(‘자전거 여행’, 김훈 지음, 문학동네, 2014) 그런데 지난해 진짜 다리가 육지와 우도 사이에 놓였다. 해상 4∼5m 높이로 폭 약 1.5m인 철제 다리다. 무지개색으로 난간을 칠해 ‘레인보우교’라고 한다. 유유자적 이 다리를 건너 보고 싶다. 물이 빠지거나 들어올 때라면 더 좋겠다. ‘고여서 썩을 틈 없이 생동하는 바다’의 진면목을 알 것 같다.

문득 생각이 든다. 물이 빠져야만 육지와 ‘소통하던’ 섬은 항상 뭍과 이어주는 이 다리를 마음에 들어 하려나. 다리에 올라 주위를 둘러봤다.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수평선이 무색할 만큼 갯벌과 하늘이 진회색으로 하나다. 우도가 전하는 하늘의 신묘한 뜻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 ‘무서운 비’를 이겨낸 정원

고흥 땅의 40%가량은 간척지다. 인구는 늘고 식량은 부족하던 1960, 70년대 물을 막아 땅을 넓혔다. 대부분 농지가 된 틈바구니에서 생겨난 정원이 ‘금세기정원’이다. 경남 마산 출신 김세기 전 죽암농장 창업주가 1966∼1977년 삽과 리어카로 바다를 메워 912ha 땅으로 바꿔 놨다. 공사비가 떨어지면 일본 탄광에서 한동안 일해 돈을 모았다고 한다.

바다를 메운 간척지 농장에 자리 잡은 ‘금세기정원’ 수변공원. 파란 다리가 가로지른 연못은 공중에서 보면 한반도 모양이다.
바다를 메운 간척지 농장에 자리 잡은 ‘금세기정원’ 수변공원. 파란 다리가 가로지른 연못은 공중에서 보면 한반도 모양이다.
소 키우는 축사를 가리려고 그 주변에 나무들을 심은 것이 시초다. 현재 약 148만 ㎡(약 45만 평) 규모 농장에서 금세기정원은 약 5만3000㎡(약 1만6000평)를 차지한다. 전남 22개 정원 중 가장 크다. 메타세쿼이아, 배롱나무, 석류나무, 동백나무, 은행나무, 이팝나무, 종려나무를 비롯한 수목 46종과 국화, 연꽃, 장미, 과꽃, 백일홍, 상사화, 수국 같은 화초 77종이 자란다. 한반도 모양 연못이 있는 수변공원도 볼만하다. 연못 중간 놓인 파란 난간의 다리를 ‘38선 다리’라고 부른다.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이 만난 판문점 도보다리가 떠오른다.

김 전 회장을 기리는 전시관 한쪽 벽에 ‘아, 무서운 비 푸른들’이라고 그의 자필 문장을 확대해 써 놨다. 폭우가 내려 작업이 한순간 허사로 돌아가던 쓰린 기억과 그 고난을 이겨내고 일군 농지를 바라보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고진감래는 이럴 때 쓰는 말이겠다.

고흥을 떠나는 날 아침, 하룻밤 묵은 펜션에서 문어잡이 통발을 바다에 던졌다. 내나로도 바닷가에 면한 이 펜션은 앞바다에 점점이 드러난 섬들 풍경이 유명하다. 이틀째 내리던 비가 잠시 숨죽인 틈을 타 해변으로 갔다. 통발에는 양파망에 든 고등어 조각을 미끼로 넣었다. 결과는 하루 정도 기다려야 한다.

이튿날 서울에서 통발 사진을 전송받았다. 문어는 없고 작은 물고기만 들어 있다. 방생한다고 했다. 비가 와서 민물이 늘면 문어는 거처를 바다 쪽으로 옮긴다니 아마 그래서 그런가 보다. 문어는 무척추동물 중 가장 지능이 높다. 순간의 기분에 장난처럼 잡을 생명이란 본디 없는 법이다. 왠지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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