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뮤지컬’의 휴머니즘, 브로드웨이를 녹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9일 13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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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토니상 작품상 극본상 등 6관왕
4명 나오는 소규모 작품이 ‘공연계 아카데미상’ 수상 이례적
‘버려진 로봇의 주인 찾기 여정’ 스토리에 글로벌 공감대

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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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한국 토종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토니상 뮤지컬 부문 작품상을 비롯해 6개 부문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1947년 시작된 토니상은 미국 연극·뮤지컬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공연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린다. 한국에서 초연된 창작 뮤지컬이 토니상을 수상한 건 최초다.

박천휴(왼쪽) 작가와 작곡가 윌 애런슨이 8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 엔딩’(Maybe Happy Ending)으로 최우수 오리지널 작사·작곡상(Best Orginal Score)과 최우수 극본상을 받은 후 기자실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2025.06.09. AP 뉴시스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8일(현지 시간)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이 뮤지컬 부문 작품상, 연출상, 남우주연상, 극본상, 음악상(작사, 작곡), 무대디자인상 등 6관왕에 올랐다. 특히 작품상은 해당 시즌 가장 빼어난 뮤지컬에 주어지는 상이다. 지난해에는 국내 공연제작사 오디컴퍼니의 신춘수 오디컴퍼티 대표가 브로드웨이에서 단독 프로듀서로 올린 창작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가 토니상에서 ‘의상 디자인상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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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드웨이에서 돋보인 휴머니즘”

2016년 서울 대학로의 300석 규모 소극장에서 조용히 막을 올린 작품은 초연 때만 해도 9년 만에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비견될 성과를 예측한 이는 많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뉴욕 맨해튼 벨라스코 극장에서 정식 개막한 후 뜨거운 현지 반응에 힘입어 공연 중이다. 10월 국내에서도 10주년 기념 공연이 예정됐다.

이 작품은 ‘윌휴 콤비’로 불리는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가 공동 창작한 뮤지컬이다. 21세기 후반 서울을 배경으로 인간에게 버려진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주인공이다. 낡은 아파트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던 둘은, 어느 날 올리버가 배터리가 방전돼 멈춰 선 클레어를 구하면서 가까워진다. 이후 올리버는 자신이 섬겼던 인간 제임스를 찾기 위해 클레어와 함께 제주도로 떠나고, 여정 속에서 두 로봇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해피엔딩’ 공식 홈페이지
‘어쩌면 해피엔딩’ 공식 홈페이지
브로드웨이 진출 초기에는 고전을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윌휴 콤비’가 현지에서 검증된 창작진이 아니었고, 외국 원작에 기반한 작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리뷰 공연 초반 4주간 주간 매출은 30만 달러(약 4억 원)를 밑돌았다. 그러나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호평이 퍼지며 분위기는 반전됐다. 지난해 12월 넷째 주 처음으로 주간 매출 100만 달러(약 13억 원)를 돌파한 뒤로 안정적인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이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받은 데는 브로드웨이와 차별화되는 정서가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란문화재단에서 초기 개발을 담당했던 김유철 라이브러리컴퍼니 본부장은 “2016년 리딩 공연 당시 브로드웨이의 일반적인 쇼뮤지컬과는 다른, 눈물 흘리게 만드는 정서가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평가를 받았다”며 “당시 프로듀서 제프리 리처즈도 ‘오랫동안 방 안에만 머물렀던 고장난 로봇들이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는 설정이 좋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박천휴, 윌 애런슨. CJ ENM 제공 ⓒpyokisik
박천휴, 윌 애런슨. CJ ENM 제공 ⓒpyokisik
팬데믹 이후 브로드웨이에서도 뮤지컬 규모가 축소되면서 중소형 작품들의 수용 여지가 커졌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국 버전에선 3명, 브로드웨이 버전에선 4명이 등장하는 어쩌면 해피엔딩은 이 같은 흐름과 맞물리며 오히려 장점을 살릴 수 있었다. 지혜원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10년 전만 해도 이 정도 소규모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올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코로나 이후 공연계가 전체적으로 힘을 빼는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작품성이 더욱 주목받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한류’의 영향도 흥행에 힘을 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드라마와 K팝, 영화 등에서 이미 검증된 한국 콘텐츠에 대한 호감도가 뮤지컬 장르로도 확장되면서, 한국적 배경을 갖춘 창작물이 더욱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병성 뮤지컬 평론가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설정 등 이국적인 요소를 억지로 로컬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국적 색채를 드러낸 점이 관객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극 중에는 올리버가 반려 식물을 ‘화분’이라 부르는 장면처럼 한국어 표현이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 “한국식 발라드는 삭제”

적절한 현지화 전략도 흥행을 견인한 요소로 꼽힌다. 브로드웨이 공연은 단순 번역 이상으로 현지 관객의 정서에 맞춘 편곡과 재구성 과정을 거쳤다. 대표적으로 한국 공연에서 인기가 높았던 넘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는 브로드웨이 버전에서 삭제됐다. 김 본부장은 “두 곡 모두 한국식 발라드 정서가 강해, 미국 관객에게는 감정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며 “대신 브라스와 재즈 풍의 편곡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한 창작진이기에 미국 시장의 감수성과 정서에 맞는 방향으로 각색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의 힘이다. 배우 4명이 주도하는 소규모 뮤지컬이 토니상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작은 극이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선율, 밀도 있는 대본, 짜임새 있는 연기와 연출이 관객과 심사위원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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