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 파마지-길거리 전단지, ‘아름다운 추상화’로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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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작가 마크 브래드퍼드 ‘킵 워킹’展
오늘 아모레퍼시픽미술관서 개막
감각적 회화-영상 등 40여점 선봬
“문화 다른 한국에 폭풍 가져오길”

지난달 30일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가 있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장에 선 마크 브래드퍼드.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지난달 30일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가 있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장에 선 마크 브래드퍼드.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990년대 30대였던 미국의 늦깎이 미대생 마크 브래드퍼드가 교수에게 작품 비평을 받을 때였다. 브래드퍼드는 평면 위에 미용실에서 쓰는 ‘파마지’를 붙이고 이렇게 말했다.

“전 이게 회화라고 생각해요.”

교수는 브래드퍼드의 작품을 한 번 내려다보고 “그럴 수도 있겠네” 하더니 “그런데 이 길로 가면 네 커리어는 끝날 거야”라고 했다.

당시 추상 회화는 잭슨 폴록 같은 백인 남성 작가의 전유물이었고, 흑인이나 여성 작가는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퍼포먼스나 설치 작품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겼다. 브래드퍼드는 생각했다.

‘왜 회화를 피해? 흑인은 추상을 하면 안 되나? 회화가 죽었다고? 그러면 뱀파이어가 되지 뭐!’

미술사의 중심에 뛰어들어 크고 아름다운 추상화를 만든 브래드퍼드는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됐다.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 2019년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지명된 브래드퍼드의 개인전이 1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개막한다. 방한한 작가를 지난달 30일 만났다.

이전 작품에서 그는 거리의 전단지(위 사진, ‘떠오르다’)나 미용실에서 쓰는 파마지(아래 사진, ‘믿음의 배신’)를 재료로 썼다. 작가는 “변두리에 있던 재료를 중심으로 끌고 와 이야기를 만든다”며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나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우저앤드워스갤러리·작가 제공
이전 작품에서 그는 거리의 전단지(위 사진, ‘떠오르다’)나 미용실에서 쓰는 파마지(아래 사진, ‘믿음의 배신’)를 재료로 썼다. 작가는 “변두리에 있던 재료를 중심으로 끌고 와 이야기를 만든다”며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나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우저앤드워스갤러리·작가 제공
이번 ‘마크 브래드퍼드: 킵 워킹(Keep Walking)’전은 회화, 영상, 설치 등 40여 점을 선보인다. 화려한 색 띠가 바닥에 깔린 설치 작품 ‘떠오르다(Float)’와 미용실 파마지로 만든 회화 연작, 길거리 전단지를 모아 만든 ‘명백한 운명’ 등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멀리서 보면 색감이 감각적이고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면 두껍게 쌓아 올린 재료를 깎고 불태우고, 뜯어낸 흔적이 너덜너덜하게 보인다. 브래드퍼드는 이를 두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고군분투”라고 했다.

“제가 미용사였잖아요. 곱슬머리 흑인이 찰랑이는 생머리를 가지려면 엄청난 노동과 고통이 필요해요. 손님한테 나무 조각을 입에 물게 하고 머리카락을 죽을힘을 다해 당겨야죠. 어떤 사람은 ‘원래 곱슬머리도 예쁜데 왜 그래?’라고 해요. 저는 ‘아니, 하고 싶으면 해야지!’라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곧 브래드퍼드의 삶이었다. 로스앤젤레스(LA) 싱글맘의 아들로 태어난 브래드퍼드는 어머니와 함께 미용실을 운영한 소상공인이었다. 손님들의 옷에 적힌 대학 이름을 보고 학교를 알았고, 거기 가면 교사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미대에 입학했다.

“예술가라는 꿈을 갖는 건 중산층이나 할 수 있는 사치였다”는 브래드퍼드에게 “그런 사람이 어떻게 추상화로 승부한다는 야심 찬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권력이 사람들을 억누를 때 화가 나요. 가난하고 아버지가 없는 나는 늘 변두리에 밀려났지만, 절대 순응하지 않았죠. 중심에 비집고 들어가 버티는 거예요. ‘왜, 난 여기 앉으면 안 돼?’ 하면서요. 전 모두가 그래야 한다 생각해요.”

이런 행동은 변화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브래드퍼드가 한국 전시를 위해 만든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2025년)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와 미국 최초의 드래그 퀸인 윌리엄 도시 스완(1860∼1925)의 삶을 모티브로 활용했다. 스완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사회적 핍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던 인물. 무언가를 억지로 덮고 가리면 그것은 더 큰 힘으로 되돌아온다는 메시지를 회화 연작과 벽면 설치에 담았다.

“이 작품을 뉴욕에서 하면 훨씬 쉬웠을 거예요. 처음엔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 어떨까 걱정했지만, 폭풍은 예상 못 한 곳에서 부는 거니까. 카트리나, 스완, 그리고 나 마크가 서울에 폭풍을 가져올 수 있기를!”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마크 브래드퍼드#추상 회화#미국 미술#베니스비엔날레#아모레퍼시픽미술관#설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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