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러 미사일보다 강했다… 우크라 여인들의 저항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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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작가가 남긴 ‘전쟁 일기’
드론 조종하는 전직 변호사 등… 전쟁 속 여성들의 이야기 기록
러 미사일 공격에 희생된 저자… 미완성된 작품 유작으로 남아
◇여성과 전쟁/빅토리아 아멜리나 지음·이수민 옮김/496쪽·2만 원·파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전쟁범죄 조사원이 된 저자는 비극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담한 문체로 풀어낸다. 그는 “나는 이 책을 일종의 탐정 소설로 간주한다”며 “정의를 추구하는 우크라이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파초 제공

“키이우(우크라이나의 수도)에서 전쟁 발발.”

2022년 2월 24일, 아들과 함께 이집트 여행 중이던 저자는 짧은 속보를 접했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귀국 비행편이 끊긴 채 공항의 텅 빈 터미널에 남겨진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한다. “유령 같던 평화의 계절은 끝났다. 모든 것이 사막 한가운데의 이 햇살처럼 분명해진다.”

신간은 우크라이나 작가인 저자가 남긴 ‘전쟁 일기’다. 그는 원래는 새 소설을 준비 중이었지만, 전면전이 시작되자 비정부기구(NGO) ‘트루스하운드’의 교육을 받고 전쟁범죄 조사원으로서 현장으로 향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각자의 인간성을 지키며 저항했는지를 치열하게 기록했다. 익숙한 소설 대신 피해자와 목격자의 증언을 써내려 간 그는 전쟁의 잔혹함을 전하면서도, 그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인간적인 반짝임을 포착해 낸다.

변호사였다가 입대해 드론 조종사가 된 예우게니야 자크레우스카. 이 책에는 폭압적인 전쟁에 맞서 싸우려는 수많은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등장한다.
책에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등장한다. 예우게니야 자크레우스카는 원래 전직 변호사였지만 군에 입대해 드론 조종사가 됐다. 러시아보다 수적으로 열세인 우크라이나는 정확도를 고려해 발사체를 보다 신중히 쏴야 했다. 민간인을 타격하지 않으려고 주의도 기울였다.

테탸나 필립추크는 20세기 우크라이나 작가들의 초판본을 피란시키기 위해 난민 열차의 화물칸에서 야간 보초를 섰다. “이 작가들은 1930년대에 학살당해서 공동묘지에 묻히고, 구소련 시절에는 추모조차 금지된 ‘처형당한 르네상스’에 속한 자들이다. … 하지만 어둠 속에서 원고를 지키는 테탸나 필립추크 같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세상의 전부이다.”

이 외에도 러시아군에 납치돼 고문당했지만 예순의 나이에 의무부대에 입대한 이리나 도우한, 러시아 관영 언론의 프로파간다를 추적하는 변호사 카테리나 라셰우스카 등이 등장한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여성들의 실명은 이 책을 지탱하는 뼈대다.

저자는 고문과 학살을 반복하는 악인들의 서사 대신 평범하지만 영웅적인 면모를 지닌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에 천착한다. 단지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살아남으려 애쓰는 사람들의 다정함을 끝까지 붙든다. “생존을 위한 규칙은 없지만 삶을 위한 규칙은 있다. 우리는 여전히 사슴벌레를 구하고, 파란불에 길을 건너고, 예의를 지키고, 우아함을 잃지 않고,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슬프게도 이 책은 미완이다. 2023년 6월 27일, 저자는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의 도시 크라마토르스크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나흘 뒤 세상을 떠났다. 향년 서른일곱이었다.

책은 전체의 약 60%가 완성된 상태였다. 남은 원고는 동료 작가들과 편집자들이 메모와 초고를 엮어 정리했다. 하지만 미완의 틈은 오히려 더 강렬하다. 파편처럼 흐트러진 원고를 얼기설기 엮은 날것의 흔적들이 전쟁의 참혹함을 마주한 한 인간의 실존적인 고민을 더욱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소설보다 극적인 현실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낸 글을 읽다 보면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라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전쟁 일기#전쟁범죄 조사#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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