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을 맞아 1910년 3월 중국 뤼순형무소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쓴 유묵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吊日本·사진)’이 11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확인된 안 의사 유묵 가운데 자신을 ‘동양지사(東洋志士)’라고 쓴 유일한 작품이다.
김광만 윤봉길의사기념센터장은 “중국 만주 관동도독부의 일본인 고위 관리가 입수해 갖고 있던 유묵”이라며 “이를 물려받은 후손에게서 올 5월 넘겨받았다”고 14일 밝혔다. 관동도독부는 당시 일제의 만주 지역 통치기구로, 안 의사의 재판을 관할했다.
폭 41.5cm, 길이 135.5cm의 명주 천에 쓰인 이 유묵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그대로 드러냈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일본인에게 써준 글들은 주로 유교적 교훈이나 심경 등을 담았다.
특히 안 의사는 “1910년 3월 동양지사 대한국인 안중근 뤼순옥중 서(書)”라고 쓰고 낙관을 했다. 안 의사의 유묵은 국내외 약 200점이 전해지는데, 다른 글엔 ‘대한국인 안중근’ 등으로만 썼다.
안 의사 전문가인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는 “평화를 해치고 전쟁을 자초한 일제는 결국 망할 것이니, 패배할 일본에 미리 조상(弔喪)한다는 뜻”이라며 “스스로 동양지사라 일컬으며 옥중에서 ‘동양 평화 만세’를 외친 기개가 반영된 ‘가장 안중근다운’ 글”이라고 평했다.
유묵은 현재 경기도가 보관하고 있으며, 추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경기도와 광복회 경기지부, 김 센터장은 해당 유묵을 들여오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형 앞두고 ‘일제 멸망’ 꾸짖는 결기… 가장 안중근다운 글씨”
[광복 80주년] 안중근 옥중 유묵 ‘장탄일성 선조일본’ 115년만에 귀환 스스로 ‘동양지사’라 쓴 유일 유묵… “장이머우 ‘죽음 초월한 글씨’ 극찬” 원소유자는 관동도독부 日고위직 후손 “日 응징하는 내용 겁났지만… 이제라도 돌아가야 할 곳으로”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吊日本).’
안중근 의사(1879∼1910)는 1910년 3월 사형을 코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이 이 여덟 글자로 일제를 꾸짖었다. 하늘로 올려붙인 선(先) 자의 삐침 획은 죽을지언정 뜻을 굽히지 않고 일제에 맞선 기개와 단호함을 보여줬다는 평이 나온다.
● “죽음을 초월한 글씨”
해당 유묵의 내용은 안 의사가 말년에 주창한 ‘동양평화론’과 이어진다. 동양평화론은 약육강식의 세계 정세 속에서 동아시아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게 골자다.
안 의사를 연구한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는 “안 의사는 일본과 조선의 싸움이 머잖아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과의 싸움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봤다”며 “이 유묵엔 결국 그 고통이 일본 국민들에게도 돌아가 일본이 결국 망할 것이라는 꾸짖음이 담겼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이어 “서예에 정통한 중국 영화감독 장이머우는 안 의사의 필치를 ‘초사체(超死體)’, 즉 죽음을 초월한 글씨라고 극찬했다”며 “이번 유묵은 결기와 의지가 집약된 걸작”이라고 덧붙였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사살한 혐의로 투옥됐고, 이 유묵을 쓰기 직전인 1910년 2월 뤼순형무소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안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된 일부 일본인 간수나 관리 등이 휘호를 부탁했다. 순국 전까지 안 의사가 형무소에서 남긴 유묵은 약 200점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실물이 확인된 국내외 90여 점 중 31건이 국가지정유산 보물로 지정돼 있다.
● ‘동양지사’의 기개 가득
안 의사의 이번 유묵은 기존에 알려진 것들에 비해 일제를 향한 비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기존 유묵은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등 점잖은 내용이 잘 알려져 있다. 김 교수는 “안 의사가 주로 유교적, 종교적 교훈이나 심중을 글로 써서 준 것과 달리, 이번 유묵에는 거센 비판이 담겨 희소성이 높다”고 했다.
글씨가 쓰인 명주 천은 당시엔 귀했던 소재다. 안 의사에게 휘호를 요청한 일본인의 지위를 가늠케 한다. 김광만 윤봉길의사 기념센터장에 따르면 기존 소유자는 일본인으로, 1968년경 선대로부터 유묵을 물려받은 뒤 자택에 보관해 왔다. 소유자는 “시대를 한탄하고 일본을 응징하는 내용의 유묵이라 처음 봤을 땐 덜컥 겁이 났다. 과연 세상에 내놓아도 될지 고민이 길었다”며 “다만 안 의사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품었던 생각을 이대로 알리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판단했다. 이제야 유묵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간다”고 양도 배경을 밝혔다고 한다.
2000년경 처음 이 유묵의 존재를 파악한 김 센터장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잘 보관된 덕에 유묵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고 했다. 이어 “당대 중국에서 일본으로 비밀스러운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베갯잇, 책자 속에 숨겨 여러 차례 검문을 통과해야 했다”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대역죄인’이 일본이 먼저 망할 것이라고 쓴 글씨를 가져가는 과정은 일본인에게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간지 대신 연호… 유독 선명한 손바닥
안 의사의 숭고한 정신은 유묵 하관(下款)에서도 느낄 수 있다. 안 의사는 이 유묵에 ‘1910년 3월 동양지사 대한국인 안중근 뤼순옥중 서’(一千九百十年 三月 東洋志士 大韓國人 安重根 旅顺獄中 書)라고 썼다.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안중근 문집’에 따르면 경술이란 간지(干支) 대신 서기를 쓰고 스스로 ‘동양지사’라고 칭한 유묵은 지금까지 확인된 적이 없다. 보물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등에는 ‘경술년 3월 뤼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삼가 절함(謹拜)’이라고 적혀 있다.
유달리 선명한 손바닥 도장은 해당 유묵이 진품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지문 감정을 맡은 한국법과학연구원 측은 “보물 ‘천여불수반수기앙이(天與不受反受其殃耳)’에 찍힌 안 의사의 손바닥과 손금 위치, 모양, 지문 특징점이 모두 일치한다”고 판단했다.
유묵은 추후 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 건립되는 ‘안중근 평화센터’에서 전시 등 용도에 활용될 예정이다. 경기도청은 “8·15 광복 80주년을 맞아 안 의사의 고향(황해도 해주)과 가까운 파주에 그 정신이라도 모시고자 유묵 반입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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