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음악이 듕귁에 달아’… 세계로 나아가는 박연의 꿈[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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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세종대왕은 중국과 다른 우리말을 한자로 기록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그래서 한글을 창제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나라 음악이 중국과 달랐던’ 것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는 세계에서 각광받는 K팝의 뿌리가 고대 무속에서 시작된 한국 음악과 춤에 있음을 알렸다. 다음 달 12일부터 한 달 간 우리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2025 영동 세계국악엑스포’가 열리는 충북 영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 난계 박연이 사랑한 옥계폭포

영동 한천팔경 중 1경으로 꼽히는 월류봉.
영동 한천팔경 중 1경으로 꼽히는 월류봉.
영동을 찾으면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봉우리와 폭포, 정자와 시냇물이 흐르는 정경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진다. 특히 월류봉과 옥계폭포는 수묵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풍경이다.

영동 한천팔경(寒泉八景) 중 제1경으로 꼽히는 월류봉 아래로는 물 맑은 초강천(草江川)이 휘감아 흐르고 있다. 달이 떠오르는 밤에 물에 비친 달빛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른 새벽 초강천에 피어나는 물안개가 월류봉 주변을 감싸는 모습도 신비롭다.

2025 세계국악엑스포가 열리는 충북 영동 출신인 난계 박연이 사랑했던 옥계폭포. 여름철 시원한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
2025 세계국악엑스포가 열리는 충북 영동 출신인 난계 박연이 사랑했던 옥계폭포. 여름철 시원한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
영동 심천면 월이산 깊은 골짜기 천손고개를 넘으면 옥계폭포가 나온다. 절벽 사이 20여 미터 높이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소리는 가슴을 뻥 뚫어준다. 옥계폭포 위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연못인 예저수가 있다.

오색 물보라를 일으키는 옥계폭포의 다른 이름은 박연폭포다. 고려 말 우왕 때 태어나 조선 세종 때 왕을 도와 궁중음악을 정비한 천재 음악가 난계 박연(1378∼1458). 그는 어릴 적부터 옥계폭포에서 풀피리를 즐겨 연주했다. 그는 폭포 옆 절벽 바위틈에서 피어난 난초에 매료돼 자신의 호를 난초 난(蘭), 시냇물 계(溪)를 써 난계라고 했다.

박연은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히는 인물. 박연의 피리 소리에는 신묘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시묘(侍墓)를 살 때 피리를 불자 호랑이가 그를 잡아먹지 않고 지켜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 정도다.

세종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의식인 종묘제례를 하면서 중국에서 수입한 ‘당악(唐樂)’이나 ‘아악(雅樂)’을 연주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음악인 ‘향악(鄕樂)’이 있는데도 중국 음악을 따르는 건 국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세종은 영동 출신 박연을 불렀다. 박연은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교리까지 역임한 사대부였지만,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인물임을 세종은 알아보았다.

“조선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는 우리 음악을 듣고, 죽은 뒤 장례나 제사를 지낼 때 중국 음악을 듣게 되니 이 어인 일이냐.”

박연은 “우리 악기로 우리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기준음을 찾을 수 있는 율관(律管)을 만들어 소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요즘에도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할 때 먼저 율관에 맞춰 조율하는 것처럼, 음에 대한 기준점이 명확해야 했다.

박연은 직접 대나무를 깎아 12율관을 만들었다. 율관은 음높이를 정하기 위해 지름은 같고 길이를 달리해서 제작됐다. 12율관이 구비돼야 음정에 맞춰 편경(編磬)이나 편종(編鐘) 같은 악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12율관은 6개의 양율(陽律), 6개의 음려(陰呂)가 있다. ‘악학궤범’에서는 12율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12월, 별자리, 지지(地支), 절기 등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율관은 도량형의 기본까지 아우르는 왕권의 상징이 됐다.

옥계폭포에서 차로 7분 거리에 영동국악체험촌, 난계국악박물관, 난계국악기제작촌, 난계사 등이 있다. 국악체험촌에는 300석 규모 공연장을 갖춘 우리소리관, 숙박하며 자연과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국악누리관이 있다. 난계국악박물관에는 박연이 만든 율관과 편경이 전시돼 있다.

조선은 그동안 중국에서 보내온 편경을 썼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매달린 옥돌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음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우리 기준음에 맞춘 편경을 새로 만들 옥돌이 필요했다. 때마침 경기 남양에서 옥의 일종인 경석(磬石)이 발견되고, 충북 청주 초수리(현 초정리)에서도 옥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세종은 기뻐했다. 장신구를 만드는 보석이 아니라, 우리 음악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소리 나는 돌’이었기 때문이다.

편경을 만드는 옥돌은 추위나 더위, 건조함이나 습함의 영향을 잘 받지 않아 음의 기준으로 삼기에 좋았다. 박연은 직접 만든 편경을 세종 앞에서 수차례 시연했다. 그런데 세종은 절대음감을 갖고 있었다.

‘임금이 이칙(夷則·12율의 하나) 1매(枚)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으니 연(박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하고 물러가서 이를 갈아 먹이 다 없어지자 소리가 곧 바르게 되었다’(세종실록 15년 1월1일)

세종과 박연은 초수리 옥으로 만든 편경 소리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실험을 계속했다. 박연은 10년 동안 세종에게 39번이나 상소를 올린 끝에 ‘조선의 기준음’을 가진 율관과 악기를 만들고 수많은 악보를 정리하는 대업을 완성했다.

●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데, 온 나라 백성이 크게 모여서 며칠을 두고 마시고 먹으며 춤추며 노래를 불렀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길목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으며,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노래를 불러 그 소리가 날마다 그치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에는 고대 국가 부여에서 해마다 음력 12월에 행하던 제천 행사 ‘영고(迎鼓)’를 이렇게 설명한다. K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에서 각광받는 K팝 스타들의 뿌리를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전통에서 찾은 것은 흥미롭다.

인구 약 4만의 소도시 영동에서는 다음 달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국악을 세계에 알리는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가 열린다. 국악을 테마로 한 최초의 엑스포다. 세계 30개국 공연단이 참가해 퍼레이드를 펼치고 전통과 현대, 지역과 세계,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공연과 체험, 전시가 이어진다.

국악엑스포 주 행사장은 영동 레인보우힐링관광지(과일나라테마공원, 레인보우힐링센터, 영동와인터)다. 한국관광공사 ‘강소형 잠재 관광지’로 선정된 영동의 특산품을 활용한 체험형 복합 치유 공간이다. 강소형 잠재 관광지는 한국관광공사가 지역 유망 관광지를 선정해서 지방자치단체와 힘을 합쳐 인기 관광지로 성장시키는 사업이다.

레인보우힐링센터는 영동의 빛 물 바람 돌을 테마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어린이 힐링뮤지엄, 릴렉스 룸, 명상의 연못, 힐링 풋 스파, 힐링 숲 정원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영동에서 나는 점토 광물 일라이트(illite)를 활용한 족욕과 온열 베드 체험도 해 볼 수 있다.

세계국악엑스포가 열리는 레인보우힐링관광지에 있는 영동와인터널.
세계국악엑스포가 열리는 레인보우힐링관광지에 있는 영동와인터널.
포도가 유명한 영동은 와인을 생산하는 농가가 많다. 길이 420m 영동와인터널는 와인 시음장, 전시장, 레스토랑, 문화공연장이 갖춰져 있다. 서울역에서 영동으로 떠나는 무궁화호 열차를 개조한 ‘영동 국악와인열차’도 운행된다. 와이너리인 ‘샤토마니 와인 코리아(Chateau Mani Wine Korea)’에서는 와인을 곁들인 오리구이와 와인 족욕을 즐길 수 있다. 국악엑스포 기간에는 영동포도축제와 대한민국와인축제도 열린다.

국악체험촌에서 가야금 강습을 받는 여행객.
국악체험촌에서 가야금 강습을 받는 여행객.
국악엑스포의 또 다른 무대는 박연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영동국악체험촌이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국악체험교실에서는 해금 장구 북 꽹과리 가야금 등을 배워 볼 수 있다. 기자도 가야금을 배운 지 30분 만에 아리랑을 연주할 수 있었다. 물론 농현(弄絃·왼손으로 줄을 눌러 높낮이가 다른 음을 번갈아 내는 주법) 같은 고난도 기술은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쉽게 줄을 튕겨 가야금을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다.

영동 국악체험촌 천고각에 있는 소원을 들어주는 북.
영동 국악체험촌 천고각에 있는 소원을 들어주는 북.
영동국악체험촌 천고각(天鼓閣)에서는 지름 5.5m, 무게 7t인 세계 최대 북을 쳐 볼 수 있다. 간절한 소망을 담아 천고를 두드리면 웅장한 소리가 하늘에 닿아 그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세계 평화를 위하여’라고 빈 후 천고를 두드렸다. 너무 세게 쳤더니 ‘쿵’ 하고 울릴 뿐 잔향이 별로 없다. 적당한 힘으로 다시 한 번 ‘둥!’ 치니 천고 소리가 온몸을 전율시키며 울려 퍼졌다.

#충북 영동#영동세계국악엑스포#박연#옥계폭포#국악체험촌#영동와인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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