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나 거인이 사는 나라 등
신화 속 지역 표시된 지도 유행
◇천하도/오상학 지음/172쪽·1만2000원·문학동네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적 사실이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질 무렵인 1600년대 중반.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한 장의 특이한 지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천하도(天下圖)”라고 부르는 지도인데, 전체 모양을 둥글게 표현하기도 했거니와 그 내용도 세계 지도의 형태로 여러 대륙과 대양을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는 인기도 많은 편이었다. 조선 후기의 지도책 중에는 손바닥만 한 이 세계 지도를 보기 좋게 맨 앞에 한 장씩 끼워 넣은 것들이 여럿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하도는 실제 지구의 모양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지도의 중심 부분은 그런대로 비슷하다. 조선과 중국, 일본 등의 나라가 표시돼 있고, 지금의 베트남, 태국,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안남, 섬라, 대완 같은 나라도 있다. 그에 비해, 지도의 주변 부분에는 알 수 없는 바다와 대륙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중국 고전 등에 나오는 온갖 신화적인 나라들이 적혀 있다. 눈이 하나뿐인 종족이 사는 ‘일목국’, 거인들이 사는 나라 ‘용백국’ 등이다.
한때 이 지도는 중국 신화를 대거 수록하고 있는 고대 중국의 ‘산해경’ 내용을 지도로 표현한 것이란 학설도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천하도는 정작 중국에선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천하도는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조선 지도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하도에 적혀 있는 신비의 나라 이름들은 어느 한 가지 책에서만 나온 게 아니다. ‘나무를 먹는 나라’라는 뜻의 식목국이나 ‘풍족할 만큼 밝은 나라’라는 뜻으로 추정되는 ‘족명국’은 천하도에만 나올 뿐 다른 책에선 찾기 힘들다. 그러니 아마도 당시 조선 사람들이 접했던 여러 기록, 전설, 신화 중에서 조선 사람들의 기준으로 중요하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나라들을 골라서 실었던 듯싶다.
도대체 왜 이런 지도가 제작되고 왜 조선에서 인기를 얻었을까? 그 이야기를 한 권으로 엮은 책이 오상학 교수의 ‘천하도’다. 긴 시간 천하도를 연구한 학자가 깔끔하게 관련 내용을 두루 정리한 책으로 딱딱한 학술서 느낌도 있지만 분량이 많지 않아 작심하고 도전하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전통적인 세계관을 소개하고 그것이 과학 지식과 결합해 어떻게 사상과 문화에 반영되는지 살피는 책이다. 신기한 대목도 많다. 예를 들어 오 교수는 천하도의 모든 괴물 종족들이 사는 나라들을 정리해 설명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패배했다는 열등감에 빠진 조선 선비들이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의 지식으로 되돌아가려는 복고적인 분위기를 숭상하여 중국 고전을 표현한 천하도 같은 지도에 빠져들었다는 학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요즘은 반대로 천하도에 표현된 새로운 시각이 더 조명받고 있다고 한다. 유럽에서 전래된 더 넓은 지구에 대한 지식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천하도가 탄생했을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
한국의 전통문화라면 아무래도 조선 말기를 먼저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과거에는 한국의 전통이 곧 쇄국 정책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많은 자료를 두루 살펴볼수록 오히려 예부터 한국인은 여러 제약 속에서도 더 넓은 세상과 교류하려는 꿈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국제 무역으로 성장하고 K팝 문화로 번영을 누리는 현대 한국의 모습은, 말하자면 전통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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