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버려진 ‘50년 일기’, 5년간 주인 추적기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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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된 인생/알렉산더 마스터스 지음·김희진 옮김/372쪽·1만8000원·문학동네


어느 공사장 옆, 손때 묻은 공책 148권이 버려져 있다. 슬쩍 들어 펼쳐 보니 누군가가 빼곡히 쓴 일기장들이다. 낯선 이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이 공책들을 독자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스튜어트: 거꾸로 가는 인생’ 등을 펴낸 영국 전기 작가인 저자는 슬쩍 일기를 훔쳐보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루 평균 1시간 23분씩, 50년간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일기장을 샅샅이 탐독하면서 이름도 성별도 모르는 일기장의 주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무려 5년 동안.

일기 속 실마리를 따라 주인을 밝혀내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주인이 생리통에 관해 쓴 대목에서 성별을 짐작하고, 1958년 한 공공도서관에서 기간제 사서로 일했던 기록을 발견한 뒤에는 그 도서관을 찾아가 과거 직원 목록을 확인한다. 일기란 “앞뒤 맥락도 없이 감정에만 치우쳐 기록되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로 관점을 흐려놓기에” 우여곡절이 이어진다. 필적학자까지 찾아가 일기 주인의 성격을 추측한다.

책은 위트 넘치는 문체 덕에 술술 읽힌다. 일기장에 단어 총 15만 개가 담긴 것을 두고 “이삿짐 인부라도 그보다 꽉 채워 넣는 재주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기 주인의 필력도 만만찮다. 어릴 적 집 마당 풍경을 회상하며 “허공에 걸린 나뭇잎의 가뿐함을 사랑한다. 혹은 나무의 잔가지나 줄기 끝에서 까치발을 뗀 꽃송이처럼…”이라고 묘사했다.

저자는 집요한 추적 끝에 마침내 일기의 주인을 찾아낸다. 그는 살면서 특출난 업적을 내지 못하고 평범한 삶을 산 사람으로 보인다. 종종 극심한 우울에 빠져, 글을 씀으로써 살고자 하는 의지를 되새긴 것으로도 추정된다.

저자는 일기의 주인이 이처럼 대단한 비밀도 성공 서사도 없는 범인(凡人)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소중히 여기면서 “정직하고 별나며 존경할 만한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책을 덮을 즘엔 은은한 행복감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엔 쓰레기통에 묻혀 있기에 마땅한 인생은 결코 없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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