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 기자의 따끈따끈한 책장]대중목욕탕의 추억… ‘K문화’로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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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단골 소재 ‘목욕탕’
유년시절 향수 느끼는 장소
최근 ‘케데헌’에 등장하기도

박선희 기자
박선희 기자
요즘 나오는 어린이 책 중 단일 소재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을 꼽자면 놀랍게도 ‘목욕탕’이다. 최근 몇 개월 내 나온 목욕탕 소재의 어린이책 신간을 대충만 헤어봐도 ‘바나나 우유 목욕탕’ ‘별 세상 목욕탕’ ‘판다 목욕탕’ ‘누가 먼저 목욕탕’ ‘산타 목욕탕’ 등등 넘쳐난다. 유치원, 바닷가, 빵집, 할머니댁 같은 곳이 어린이 책 단골 배경이 되는 건 특이할 게 없지만 그림책 소재가 대중탕이라니.

그런데 ‘목욕탕 책이 또 나왔네?’ 하면서도 매번 저절로 손이 가고, 왠지 모를 나른한 기분으로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모험의 세계로 빠지는 이야기를 넘겨보게 된다. 역시 책을 낸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뼛속까지 한국인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휴식과 재충전을 넘어 만남과 유대와 힐링의 역할까지 담당하는 곳. 모락모락 수증기가 폭폭 올라오는 오래된 대중목욕탕은 보통의 한국 사람들에게 추억의 공간이다. 목욕탕을 소재로 한 어린이 책에 꼭 목욕 후 마시는 바나나 우유나 요구르트, 냉탕 수영 같은 게 나오는 이유다. 허름한 동네 목욕탕 대신 워터파크 같은 대형 복합시설이 대세가 된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도 이태리타월로 등 밀어주고, 냉탕에서 잠수하고 물장구치는 감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문화는 절찬리 출간 중인 목욕탕 그림책에서 알 수 있듯 미래 세대에게도 성공적으로 전수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백희나 작가의 ‘장수탕 선녀님’이다. 날개옷을 잃어버려 동네 목욕탕 냉탕에서 살게 된 선녀 이야기인 원작 그림책 인기에 힘입어 상시 공연되는 뮤지컬도 있다. 실제 공연장에선 아이들 호응이 열렬하다. 엄마나 아빠 손에 이끌려 대중탕 문화를 조기 체험 한 한국 어린이들은 일요일 이른 아침 세신하고 나오며 맞는 찬 공기나 요구르트에 빨대 꽂아 먹는 개운함을 감각적으로 아는 것 같다.

한국인조차 감탄시킨 철저한 고증으로 유명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도 목욕탕이 나온다. 비밀을 감추기 위해 가장 가까운 그룹 멤버들과도 목욕탕에 함께 가지 않는 아이돌 가수 루미는 곁을 잘 주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 루미에게서 다른 멤버들이 은근히 ‘심리적 장벽’을 느끼는 극 중 설정은 참으로 한국적이다. 그러니 루미가 자신의 약점을 밝힌 뒤 마침내 자유와 해방감 속에서 멤버들과 간 곳 역시 당연히 목욕탕이다.

얼마 전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집 ‘단 한번의 삶’에도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동네 목욕탕에 갔던 작가의 유년 시절 일화가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세대와 지역, 성별을 불문해 한국인을 묶어주는 공통의 기억엔 언제나 목욕탕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쯤 되면 한국 사람들은 ‘목욕의 민족’이 아닌가.

‘씻는다는 것의 역사’란 책에 따르면 한국에 대중목욕탕이 급격히 늘어난 건 1980년대였다. 이후 현대식 아파트 보급, 팬데믹 등을 거치며 대중탕의 개체 수나 역할은 급격히 축소됐다. 하지만 목욕탕이 주는 그 ‘감성’만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 기억이 작가들 입담을 통해 책과 영상, 무대 위에서 끝없이 재생되면서 이제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찾는 새로운 K문화로 빚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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