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시력(詩歷) 시인의 꿈은… 여전히 ‘마음이 가난한 사람’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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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편의점에서 잠깐’ 펴낸 정호승 시인
‘택배’ 이어 현대적 상징 ‘편의점’ 주제로
편의점서 각자 따로 물건 계산해 가듯… 자기 이익만 생각하기에 이별 불러
“노년이라도 시가 늙으면 안된다 생각”

정호승 시인의 새 시집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시가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는 부모님 댁에 빈방 하나를 작업실로 삼고, 돌아가실 때까지 15년간 매일 출퇴근했다. “15년이나 그리했는데도 떠나시고 나니 보고 싶어요. 아버지 지팡이는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지팡이가 필요해지면 아버지 떠올리며 짚으려고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정호승 시인의 새 시집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시가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는 부모님 댁에 빈방 하나를 작업실로 삼고, 돌아가실 때까지 15년간 매일 출퇴근했다. “15년이나 그리했는데도 떠나시고 나니 보고 싶어요. 아버지 지팡이는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지팡이가 필요해지면 아버지 떠올리며 짚으려고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정호승 시인(75)은 가방 안주머니에 항상 지폐를 종류별로 넣고 다닌다. 시인이 “5만 원짜리 사건”이라고 부르는 날 이후부터다.

어느 날 시인은 지하철 역사에서 구걸하는 노숙인을 마주쳤다. 지갑을 보니 1000원짜리도, 1만 원짜리도 없고 5만 원짜리 지폐만 있었다. 지갑을 꺼내 들었으니 상대는 시인의 손만 쳐다보는 상황. “미안해요. 다음에 드릴게요.” 결국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시끄러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그때부터 정 시인은 가방에 1000원, 5000원, 1만 원짜리 지폐를 다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3년 만에 신작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창비)을 낸 정 시인을 1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그의 서류가방 안엔 꼬깃꼬깃 접은 지폐들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53년 시력(詩歷)의 시인은 요즘 화두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마음의 부자가 되려면 (역설적으로) 마음이 가난해져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시를 쓰기 어렵거든요. 영혼과, 마음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시인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에요.”

할머니들이 지하철에서 강낭콩이나 호랑이콩을 팔면 지나치지 않는다. 구두는 집에서 닦지 않고 꼭 구두 닦는 이에게 맡긴다. ‘마음이 가난해지기 위한’ 시인의 한 방편이다.

“해마다 12월 1일이면 거리에 구세군 냄비가 등장해요. 제 원칙은 ‘처음 만나는 구세군 냄비에 반드시 돈을 넣는다’예요. 그다음 냄비도 ‘이거는 아내 몫, 이거는 아들 몫, 이거는 며느리 몫’ 하면서 넣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약속에 늦었으니까 그냥 가자’ 하고 지나치기도 하죠. 그러면 ‘아, 내가 끝까지 실천을 못 하는구나’ 싶죠.”

마음이 가난해지기. 시인은 “말처럼 쉽진 않다”고 털어놨다. 엎어지고 일어서기의 반복인 ‘마음 가난해지는 길’에 대해 그는 시에서 솔직하게 노래했다.

“나도 이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생각하는 순간 바다에 빠져 죽었다”(시 ‘마음이 가난해지기 위하여’에서), “나는 마음으로 가는 길을 가지 못하고/그만 돌다리에 파묻혔다”(시 ‘마음으로 가는 길’에서).

깨달았다고 여긴 순간 불쑥 찾아오는 번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시구(詩句)다.

2022년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에서 슬픔에 ‘택배’라는 현대적 상징물을 접목시켰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선 ‘편의점’을 등장시켰다. 그는 “이제 물리적으로 노년이긴 해도 ‘시가 늙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며 “그래야 읽는 사람도 안 그래도 지쳐 있는 삶에 생동감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표제작 ‘편의점에서 잠깐’은 늦은 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우연히 만난 옛 연인이 주인공이다. 해후의 장소가 버스정류장도, 길거리도 아닌 편의점이라니.

“편의점에서는 ‘계산’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왜 이별이 이뤄졌을까를 생각해 보면 자기 이익을 계산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얼마만큼 나누고 줬는가를 편의점에서 만났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시에는 “당신이 산 캔맥주는 당신이 계산하고/내가 산 컵라면은 내가 계산”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의 것은 내가 계산하고, 내 것은 당신이 계산하던’ 옛 시절이 떠올라 구슬퍼지는 구절이다.

1972년 등단해 반세기 넘게 독자들을 위로해온 시인. 그는 “이번 시집으로 바라는 단 한 가지도 시를 통한 위안”이라고 했다. 널리 알려진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산산조각’을 언급하며 “살다 보면 누구 인생이든 다 산산조각이 난다”고 했다. “그럴 때 ‘오늘도 산산조각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당부와 함께.

“네팔 룸비니에서 흙으로 만든 부처님 형상을 사 왔거든요.(시인의 종교는 가톨릭이다.) 근데 책상에 둔 순간부터 걱정되는 거예요. 흙으로 만들었으니 떨어지면 산산조각 나잖아요. 근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은 거 아니냐.’ 거의 20년 전 시인데 저도 최근 그 시에서 위안을 받았어요. 그 시 쓰고 제게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어요. 생각을 바꾸면 편안해집니다. 물론 100%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요.”



#정호승#시인#마음 가난#지폐#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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