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연구 끝에 ‘다시 만난 하늘’…동서양 천문도 한눈에 본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24일 15시 36분


코멘트
신·구법천문도

“큰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니 별이 수십 배 많아 보이고 경계가 매우 명료해졌다. (…) 은하수는 곧 무수한 작은 별들이라, 그 조밀함 때문에 마치 흰 강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8폭 병풍 ‘신·구법천문도’(新·舊法天文圖)의 제4~7폭에는 이런 설명이 적혀 있다. 당시 첨단 기술인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측한 서양의 천문 지식이 담긴 것. 병풍 마지막 폭에는 맨눈으로 관측하기 힘든 태양의 흑점, 토성의 5개 위성 등도 세밀히 묘사돼 눈길을 끈다.

신·구법천문도의 일러스트 도판
신·구법천문도는 조선 전기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1~3폭에 ‘구법’으로, 서양식 ‘황도남북양총성도(黃道南北兩總星圖·이하 황도총성도)’와 ‘일월오성도’를 나머지 폭에 ‘신법’으로 담아낸 국가지정유산 보물이다. 황도총성도는 청나라에서 활동한 독일 출신 선교사 이그나츠 쾨글러(1680-1746)가 1723년 작성한 이후 조선으로 전래됐다.

이를 국립민속박물관이 약 6년에 걸쳐 연구, 복원해 이달 17일부터 기획전 ‘다시 만난 하늘’에서 선보이고 있다. 전지연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동·서양식 천문도가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된 사례로는 동아시아 3국 중 유일한 것으로 확인된다”며 “안료와 도상, 한자 모양 등을 분석한 결과 국내외 현존하는 여러 이본(異本) 중 가장 이른 1788년경 제작됐다고 추정된다”고 말했다.

신·구법천문도를 보존처리 중인 모습
이처럼 독특한 형태의 천문도를 만든 이유는 뭘까. 우선, 성리학을 따른 조선에서 천문도는 강력한 왕권을 상징했다. 고지도 전문가인 장상훈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조선왕조는 개국 3년 만인 1395년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했다. 왕조의 기틀을 다진 주역인 문신 권근(1352~1409)이 이를 추진했다”며 “새 왕조의 우주론적인 정통성을 증명하고, 하늘의 때를 받들어 아래로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적인 구법 천문도가 서양의 근대 천문학에 기반한 신법 천문도로 대체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상황과 관련 깊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구법 천문도는 투영법과는 상관 없이 별자리의 위치와 형태를 어림으로 그려 넣었고 북극이 중심에 놓였기에 왜곡이 상당하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개국과 함께 제작된 천문도로서 오랫동안 권위를 이어 갔다”고 했다. 조선 영조(재위 1724∼1776)가 값비싼 천체망원경을 수입하고서 왕권 하락을 이유로 부숴 버린 일화도 전해진다.

신·구법천문도를 보존처리 중인 모습
이에 신·구법천문도는 조선 후기 왕조와 지식인이 외래 문물을 절충적으로 취한 사회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안상현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신법 천문도 속 별자리와 행성의 모양, 위성 유무 등을 황도총성도와 비교하고, 황도총성도의 모본인 이탈리아 ‘브루나치 천문도’와도 비교 분석했다. 안 연구원은 “당시 서양식 표기법이던 ‘황도좌표계’를 도입하되, 유럽 선교사들이 새로이 추가한 별들을 빼고 중국 전통 별자리 1464성만 남겨둔 것으로 확인된다”며 “별 색깔을 3가지로 분류한 것도 중국 전통에 따른다”고 말했다.

즉, 전통 지식을 존중하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최신 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 했던 것. 안 연구원은 “근대 천문학의 발견인 성운과 성단,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남반구의 별, 서양의 기하학적 도법 등이 전통 천문학과 함께 다채롭게 담겼다”고 했다. 당대 지도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드러난다. 장 관장은 “18세기 후반 지도책인 ‘여지도(輿地圖)’(국가지정유산 보물)에는 전통적인 지도와 서양식 세계지도 ‘천하도지도’가 같이 수록됐다”고 말했다.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