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은 어디일까요. 명품 패션그룹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프랑스)? 비만 주사제 위고비의 노보 노디스크(덴마크)? 아니, 이제 이 기업입니다. SAP. 독일의 IT 기업이죠. (‘에스에이피’라고 읽습니다.)
SAP는 ERP(전사적 자원관리)라고 부르는 업무용 소프트웨어로 유명한 기업입니다. 느리고 시대에 뒤처진 줄 알았던 거대기업 SAP는 어떻게 유럽을 대표하는 AI 선두 주자로 떠올랐을까요. 오래된 IT 기업의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오늘은 SAP의 변신을 들여다보겠습니다.
SAP, 아마 그 이름조차 낯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소프트웨어 중에서도 주로 대기업에서 쓰는 업무용 제품을 만들고 파는 기업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일상에서 SAP 프로그램을 접할 일은 없습니다. 대신 웬만한 글로벌 대기업(엔비디아, 삼성전자 포함)은 모두 SAP 제품을 쓰죠. 세계 100대 기업 중 98곳이 SAP 고객이라는데요. 전 세계 고객사 수는 40만 개에 달합니다.
SAP의 대표상품은 ERP(전사적 자원관리)이죠. ERP는 또 뭐냐고요? 30~40년 전만 해도 기업의 각 부서는 각자의 영역에서 따로 일했습니다. 그 시절엔 영업팀이 고객 주문을 접수하면 그걸 일일이 전화나 서류작업으로 넘겨줘야만 구매팀이 그 주문을 파악할 수 있었죠. ERP는 이 모든 걸(영업·생산·구매·회계·물류 등) 하나의 시스템으로 합친 겁니다. 영업팀으로 주문이 들어오면 그게 바로 구매팀 화면에도 뜨고요. 모든 거래가 발생하는 즉시 장부에 기록되기 때문에 재무팀은 바로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죠. 수백 군데에서 주문받고, 전 세계 10여 개 공장에서 제조하는 대기업이라면 ERP 없인 일이 돌아가질 않습니다.
1990년대 SAP의 대표 제품이었던 R/3. 2004년 SAP ERP로 대체될 때까지 널리 사용됐다. 지금은 SAP S/4HANA로 진화했다. SAP 제공
IBM 출신 엔지니어 5명이 1972년 설립한 SAP는 ERP를 사실상 발명한 기업입니다. 글로벌 ERP 시장에서 SAP는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등과 경쟁 중인데요. 큰 기업일수록 가격이 비싸더라도(수십~수백억 원) 보안성 높고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제품을 주로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또 ERP는 워낙 방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이라, 일단 한번 들여놓으면 웬만해선 바꾸기가 불가능합니다. 오죽하면 “CIO(최고정보책임자)가 해고당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안 사고 아니면 ERP 교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죠.
바로 그 두 가지 점-①다른 큰 기업들도 SAP를 쓰니까 따라서 SAP를 선택한다(“SAP를 선택했다고 해서 해고된 사람은 없다”) ②중간에 바꾸면 매우 골치 아프기 때문에 그냥 계속 쓸 수밖에 없다(전환비용 큼=강력한 해자=록인 효과)-이 SAP가 수십 년 동안 ERP 시장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지켜온 큰 이유로 꼽혔습니다. SAP 제품을 실제로 썼던 IT 담당자들 사이에선 사용성 면에서 악명 높았었는데도 말이죠(UX가 끔찍하다, 1970년대 제품 같다 등등).
혁신기업의 딜레마
2010년대, SAP는 실적과 주가 모두 꽤 잘나갔습니다. 하지만 뭔가 시대에 뒤처지고 있단 느낌은 안팎에서 모두 받았죠. 당시 SAP 주요 제품은 클라우드 기반이 아니라 구축형(온프레미스, on-premise). 고객이 큰 비용을 들여 한꺼번에 구입한 뒤, 이를 자기네 서버에 직접 설치해서 사용하는 오래된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일단 한번 설치하면 업그레이드가 쉽지 않죠. 돈도 많이 들고 너무 복잡하니까요. 업그레이드는 5~7년에 한 번쯤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온갖 훌륭한 신기술이 쏟아져 나왔고, SAP의 주요 제품은 점점 낡고 구닥다리처럼 보였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면 고객을 붙잡을 수 없게 된다, 미래를 위해선 클라우드로 가야만 한다. 나아갈 방향은 빤히 보였습니다. 전임 CEO인 빌 맥더모트는 카리스마 넘치는 미국인이었는데요. 그는 위기 돌파를 위해 과감한 M&A를 거듭했습니다. 2011년부터 유명 소프트웨어 기업 인수에 총 310억 달러(약 43조원)를 썼고요. 덕분에 새로운 클라우드 기반 제품을 잇달아 추가했죠. 이 시절 SAP는 분명 진취적으로 미래를 모색하는 기업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달라졌을까요? 아니요. 겉보기엔 많은 신규 클라우드형 제품을 쏟아냈지만, 정작 핵심 사업은 그대로였습니다. 왜? 여전히 기존 사업 모델(구축형 ERP)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거든요. 굳이 돈 잘 버는 사업의 방향을 틀어야 할 필요를 못 느낀 거죠.
고객들 역시 일하는 방식을 바꾸거나 추가 비용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고요(대기업 IT 담당 부서는 원래 보수적입니다). 무엇보다 당장 돈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사실 클라우드로 바뀌면 일시적으로는 수익이 줄어들 수 있죠. 기존엔 고객이 거액의 라이선스 비용을 한꺼번에 냈지만, 클라우드 기반에선 그걸 여러 해에 걸쳐 구독료로 나눠 내게 되니까요.
말로는 ‘과감한 혁신’을 외쳤지만, 실제론 치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SAP는 전형적인 ‘혁신가의 딜레마’에 빠져있었죠. 혁신을 위한 모든 자원(인력·자금·기술)은 충분히 갖고 있었지만, 진짜 파괴적 혁신을 하려면 스스로에게 칼을 겨눠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저했고, 그만큼 혁신은 지체됐죠.
주가 -22% 폭탄선언
2019년 SAP는 신임 CEO로 크리스티안 클라인 COO를 발탁합니다. 1980년생인 클라인은 1999년 대학생 인턴으로 입사해 CEO까지 오른 완전한 ‘SAP 맨’이었죠. SAP를 속속들이 누구보다 잘 아는 부드러운 말투의 독일인이 개혁의 키를 쥐게 됐는데요.
크리스티안 클라인 CEO는 스스로를 ‘SAP의 아이’라고 칭할 정도로 SAP에서 다양한 보직을 경험하며 성장한 인물이다.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SAP CEO에 올랐고, 지금도 DAX 상장사 CEO 중 가장 젊다. SAP 제공
2020년 10월, 클라인 CEO가 초대형 폭탄을 터뜨립니다. 핵심제품인 ERP 고객 기반을 클라우드로 빠르게 전환한다는 계획과 함께, 이를 위한 투자로 인해 향후 영업이익률이 기존 전망보다 4~5%포인트나 감소할 거라고 선언했죠. 장밋빛이었던 이전의 중기 계획은 무효화하고, 수년간 약 40억 유로의 이익이 날아갈 거라고 예고한 겁니다. 클라인 CEO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투자자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졌습니다. 독일 시총 1위였던 SAP 주가는 이날 하루 만에 22% 넘게 폭락합니다. 24년 만의 최대 낙폭. 약 300억 유로(약 47조원)의 기업 가치가 증발합니다. 당시 블룸버그는 기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주가 폭락은 투자자들이 인내심을 잃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입니다. 클라인 CEO는 오르기 힘든 가파른 산 앞에 서 있습니다.”
클라우드+AI 다 잡았다
그리고 2025년. SAP는 노보 노디스크(덴마크 제약사), ASML(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에르메스, LVMH(프랑스 명품업체)를 모두 제치고 유럽 상장사 시총 1위(약 490조원)에 올랐습니다(세계 순위는 27위). 이제 폭스바겐과 메르세데스 벤츠를 포함한 독일의 모든 자동차 부문을 합친 것보다 SAP 시총이 더 크죠. 지난 3년 주가 상승률은 170%에 달합니다.
SAP의 최근 5년 주가 추이. 2020년 10월 100유로 아래로 떨어졌던 주가는 2022년까지도 100유로 안팎에 머물렀다. 구글 금융
주가 급등의 원동력은 역시 클라우드. SAP는 올해 1분기 매출 중 55%(49.9억 유로)를 클라우드에서 올렸습니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로 벌어들인 매출(29.5억 유로)은 1년 전보다 4% 줄었지만, 클라우드 매출은 26%나 늘었죠. 이런 추세대로 가면 올해 연간 216억~219억 유로의 매출을 클라우드 부문이 거뜬히 거둘 걸로 기대됩니다. 영업이익(연간 106억 달러 추정) 역시 30% 급증할 전망이고요. “지난 2~3년간의 공격적인 클라우드 전환이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보여준다”는 분석(블룸버그 인텔리전스 애널리스트 아누락 라나)이 나옵니다. 구독모델로 바꾸면서 고객 1인당 평균 지출액은 늘어나는 추세이죠.
SAP의 분기별 클라우드 매출(파란색)과 클라우드 매출총이익(회색) 증가 추이. 전년 대비 증가율이 각각 26%와 30%에 달할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르다. SAP 제공
SAP가 AI(인공지능) 서비스 기업으로 나아간 점도 주가엔 호재입니다. 클라우드로 전환했기에 그 위에 AI 서비스를 얹을 수 있게 된 건데요.
예를 들어 SAP가 모든 클라우드 구독 고객에게 제공하는 ‘쥴(Joule)’이란 이름의 AI 에이전트가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ERP 사용을 위해 복잡한 키보드 단축기를 외울 필요 없이, 이런 식으로 쥴에게 명령하면 필요한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쥴. 이 재료의 공급업체를 찾고 싶어. 비용과 납품 가능 여부를 기준으로 공급업체를 선택하게 해줘.’
클라인 CEO는 이렇게 말합니다. “쥴이 새로운 우리의 UI가 될 겁니다. SAP를 인간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과 거의 같지만, 더 이상 데이터를 입력하고 데이터를 내보내고 문서를 화면으로 볼 필요가 없죠.”
SAP는 AI 에이전트 ‘쥴’을 클라우드 구독 고객에게 제공한다. 다른 버티컬 AI 에이전트와 달리, SAP의 쥴은 인사·재무·구매·수요·재고 등 다양한 기업 데이터를 연결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SAP 홈페이지
SAP는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자체 개발하지도 않고,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추가로 짓는데 열 올리지도 않습니다. 대신 여러 LLM과 협업하고, AWS·애저·구글을 포함한 다양한 클라우드서비스를 통해 제품을 제공하는 AI 기업이죠. “고객은 선택권을 좋아합니다. 저는 ‘보세요. 우린 이런 파트너십에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승리의 공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식 소프트웨어로 여겨졌던 ERP에 클라우드 컴퓨팅과 AI가 결합되자 새로운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줄 알았던 레거시 IT 기업이 갑자기 성장주로 변모했죠. 53년 역사의 기술 기업이 파괴적인 기술 변혁 시대의 선두 주자로 꼽힐 줄이야. 괄목상대할 만한 일입니다.
물론 이런 전환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SAP는 2023년과 2024년에 각각 3000명의 직원을 해고했죠. “AI를 비롯한 전략적 성장 분야로의 전환을 위한 것”이라고 회사 측은 밝혔는데요. 독일에선 수천 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인도에선 오히려 채용을 크게 늘렸습니다. 다소 씁쓸한 AI 발 비용 절감이죠.
또 지난해 클라인 CEO가 받은 연봉(1900만 유로, 약 302억원)이 전년보다 165%나 급증해서 화제였는데요. 같은 기간 독일 직원 2만4000명의 연봉인상률(2.4%)과의 대조가 극적이어서 내부 불만이 쌓여갑니다.
하지만 클라인 CEO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라며 변화가 계속될 거라고 말합니다. “겸손을 잃지 마세요. 성공을 자축하며 ‘좋아, 앞으로 10년은 지금처럼만 하면 돼’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안 돼요, 안 돼요. 세상은 변하고 있어요.” By.딥다이브
SAP의 변신은 어쩐지 마이크로소프트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돈 잘 벌지만 정체된 거대 IT 기업, 완전히 내부 출신인 CEO, 클라우드와 AI로의 급격한 방향 전환.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대기업 ERP 분야의 강자, 독일 소프트웨어 기업 SAP. 강력한 해자를 가진 탄탄한 IT 기업이었지만 시대에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민첩한 변화를 위해 필요한 건 클라우드로의 전환. 2010년대 SAP는 연이은 M&A에 나섭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액을 들여 M&A를 하고 신제품을 추가해도 회사는 실제론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돈 잘 버는 핵심 사업을 흔들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혁신기업의 딜레마였습니다.
-2020년 클라인 CEO는 클라우드로의 과감한 전환과 함께 이로 인해 당분간 이익이 급감할 거라고 선언합니다.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고, 한동안 주가는 바닥을 쳤죠. 추진력 있게 밀어붙인 효과는 이제 나타납니다. 클라우드 컴퓨팅에 AI까지 결합하면서 SAP는 새로운 성장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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