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강원 평창군 모나용평에서 만 99세 생일에 스키를 타고 스키어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이근호 설해장학재단 이사장(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과 신달순 모나용평 대표(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모나용평 제공
“100세 전에, 바로 한 살 전 백수(白壽·99세) 때 발왕산에서 멋지게 스키를 타 볼게요. 그때 만납시다.”
5년 전인 2020년 2월 어느 날, 강원 평창군 발왕산 자락에 있는 모나용평(용평리조트) 스키 슬로프에서 만난 어르신은 자신을 믿어 보라고 했다. 나이는 70대 후반 정도, 많아 봐야 80대 초반으로 보였다. 조심스럽게 연세를 물어보니 94세였다. 어르신은 살며시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에 1926년생 숫자가 선명했다. 당시에도 구순을 훌쩍 넘긴 어르신은 속도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주 수월하게 슬로프를 내려왔다. 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5년이 지나, 그 말을 했던 이근호 설해장학재단 이사장(전 대한스키협회 부회장)이 약속을 지켰다. 이 이사장은 5일 모나용평에서 5년 전과 변함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스키를 탔다. 안전요원이 옆에 붙었지만 이 이사장은 여유롭게 방향 전환까지 하며 옐로 슬로프를 누볐다.
한국원로스키인회, 대한스키스노보드협회와 모나용평은 만 99세, 우리 나이로 100세 생일을 맞은 이 이사장을 위해 ‘백수시대 스키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스키 원로 100여 명이 참석해 축하했다.
이 이사장이 스키와 인연을 맺은 건 대구 계성고 동기인 김재현 전 쌍용그룹 부회장(2013년 작고)이 1983년 제12대 대한스키협회 회장을 맡으면서다. 친구의 부탁으로 협회 부회장을 맡고 이듬해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 겨울올림픽을 대비한 프랑스 그르노블 전지훈련 때는 단장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다. 선수들이 전부 훈련을 나가자 근처 스키학교에서 스키를 배웠다. 1년 동안 스키장에 살다시피 했고, 일본에서 2급 스키 지도자 자격증도 땄다.
해운업을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던 이 이사장은 환갑이 다 돼서 시작한 스키가 습관이 되면서 흔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 하체 건강도 유지했다. 크게 아팠던 건 22년 전, 폐에 작은 용종이 생겼던 것 말고는 없다. 당시 폐 한쪽을 드러내는 수술을 받았는데, 스키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추스르고 안정을 찾았다.
“암은 아니고 작은 혹 같은 것이었는데 당시 내시경 수술 기계가 도입된 지 얼마 안 돼 조작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쪽 폐를 떼어 내게 됐습니다. 스키가 있어서 아픔을 이길 용기가 생겼죠. 제게는 스키가 한 쪽 폐나 다름없습니다.”
이 이사장은 스키에 몸을 맡기면서 자신의 호(雪海)를 따 설립한 설해장학재단을 통해 국내 스키 유망주와 각종 대회 메달리스트들도 지원해 왔다.
5년 전 이 이사장에게 평생 시즌 이용권을 증정했던 모나용평 신달순 대표는 이날 100세 스키어의 상징인 ‘100+’ 완장을 백수 스키어에게 달아주고 최고 원로로 예우했다. 신 대표는 “이사장님이 스키에 보여준 열정은 사회 전체에 귀감이 될만하다”며 “100+ 완장을 또 바꿔 드릴 때까지 스키를 타실 것 같다”고 존경심을 보였다.
“내년에 또 만나지요.”
이 이사장이 만 100세에 스키를 타겠다고 또 약속했다. 그렇다면 정말 ‘만세(萬歲)’를 외칠 만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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