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발목잡는 상법 개정안]
산업계, 野추진 상법 개정안 반발
“경쟁국과 달리 주주로 의무 확대… 도입 근거 美사례도 강행규정 아냐
시행땐 이사진 상대 배임소송 남발… 주주 입김에 장기 투자 막힐 우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2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상법 개정안 통과를 예고하자 산업계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갈라파고스법’이 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등 주요국이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로 한정하고 있는데 한국만 ‘회사 및 주주’로 넓혀 글로벌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산업계는 상법 개정안이 이대로 국회 문턱을 넘는다면 회사 이사진을 상대로 한 주주들의 배임 소송이 남발하고, 기업들이 주주 입김에 의해 단기 이익만 좇는 상황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25일 한국경제인협회 분석에 따르면 주요 국가들은 대부분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로 한정하고 있다. 미국은 모범회사법, 영국·캐나다·일본은 회사법, 독일은 주식법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명시했다. 이에 앞서 대한상공회의소가 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지배구조 규제를 비교한 결과에서도 호주, 싱가포르,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가 아닌 회사로 한정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미국 델라웨어주가 회사법으로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상법 개정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실제 델라웨어주의 회사법에는 ‘회사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 위반이 있으면 이사의 면책 불가’라는 내용이 있지만 해당 조항은 회사 정관의 선택적 기재 사항으로 열거돼 있다.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가 강행 규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24일 야당 주도로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에는 제382조의3을 고쳐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기존에는 충실 의무 대상이 회사로 한정돼 있었다.
김대종 세종대 경제학부 교수는 “회사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을 하려 하거나 배당 대신 연구개발(R&D)에 투자하려고 하는데 소수 주주들은 이런 것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다”며 “주주들 사이에서도 이해관계가 다른 만큼 많은 국가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로 한정했는데 한국만 규제로 묶인 갈라파고스가 될 판국”이라고 지적했다.
● 단기 이익 좇는 주주에 휘둘릴 가능성
만약 상법 개정안이 이대로 통과된다면 이사진들이 주주들을 위해 단기적 이익을 좇는 경영에 매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우 재무적 투자자들이 많기에 기업 성장보다는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해 6월 기준 국내 전체 상장사 주식 중 30.0%, 매출 10대 상장사 주식 중 46.8%에 달할 정도로 외국인 지분 비율이 높다.
상법 개정안이 결국 ‘배임 소송 남발법’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경영 판단 결과를 놓고 이익이 침해받았다고 생각한 주주들이 이사를 상대로 잇달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실 의무 위반이 인정되면 형법에 의한 배임죄로 처벌을 받거나 주주총회에서 해임 의결, 개인적 손해배상까지 제기될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소송이 남발하게 되면 사외이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회사가 자금 확보를 위해 신주 발행을 하려면 기존 주주들의 주식 가치가 희석되기 때문에 반발을 살 가능성이 있다. 신사업 분야에 대한 인수합병에 나설 때도 주주들의 만장일치가 없으면 추후 소송의 대상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송승혁 대한상공회의소 금융산업팀장은 “주주의 이익을 어디까지 보장해 줘야 하는지 케이스에 따라 모두 분쟁으로 이어지고 확정 판결까지 수년을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라며 “그사이 기업들이 투자 적기를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권용수 건국대 교양학부 교수는 “상법 개정안의 원인이 된 합병 과정에서의 불공정, 물적분할에서의 소액주주 소외는 자본시장법이나 정부 가이드라인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