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하청 제조업체 소속 노동조합들이 사측이 즉시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을 교섭안으로 제시하고, 이를 관철하지 못할 경우 원청 대기업을 상대로 직접 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사례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해 선고된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이 갈등의 촉매가 되면서, 중소 협력업체들이 경영상 중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업계에서는 일부 노조가 이 기회를 정치적 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이앤에스 지회는 최근 원청 삼성전자를 향해 직접 교섭을 요구하며,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등 정치권과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앤에스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웨이퍼 운반 용기 세척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으로, 지난해 노조가 설립된 이후 본격적인 단체교섭이 진행 중이다. 노조는 지난해 대법원이 판결한 통상임금 확대 적용을 근거로 연 400%에 달하는 정기상여금 전액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회사 측은 통상임금 전면 반영 시 연간 인건비 부담이 15억 원 이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이는 지난해 영업이익(6억 원)의 두 배가 넘는 수준으로, 즉각적인 수용은 사실상 경영 불능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협력업체 측 주장이다.
회사는 우선 상여금의 30~40%만 통상임금에 반영하고, 나머지는 단계적으로 협의하자고 제안했지만, 노조는 이를 ‘임금 체불’로 규정하고 강경한 투쟁에 나섰다. 나아가 원청 삼성전자를 직접 겨냥해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하는 등 교섭 대상자인 협력업체를 사실상 ‘패싱’하고 있다.
한 사용자단체 관계자는 “단체교섭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노조가 원청 기업을 상대로 공개적 압박에 나선 것은 협력업체의 교섭 권한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노조 본연의 기능보다 정치적 목적에 무게를 두는 행보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는 민주노총이 추진 중인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과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해당 법안은 하청 노동자가 원청을 ‘사용자’로 규정해 직접 교섭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조는 기자회견에서 해당 법안 통과를 함께 요구하며 사실상 입법 압박에 나섰다.
실제로 금속노조는 삼성전자 사례에 이어 지난 19일 현대차그룹 본사 앞에서도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차그룹의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진짜 사장은 현대차”라며 직접 교섭을 요구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노란봉투법을 관철시키기 위한 전국 단위 ‘정치 투쟁’의 일환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소기업계는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기존 통상임금 기준에 따라 상여금 구조를 설계해왔는데, 최근 대법 판결로 기존 관행이 뒤집혔다”며 “인건비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노조는 정치권과 연대해 원청 기업을 압박하고 있어, 하청업체들은 고스란히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법조계 한 관계자는 “대법 판결이 나왔다고 해도 기업의 지급 여력과 단체교섭 과정을 존중하지 않으면 노사 관계가 파행될 수밖에 없다”며 “사용자 개념의 무리한 확대는 법적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소 제조업체들은 경영 현실을 무시한 통상임금 적용 요구와 정치권 연계 투쟁이 확산될 경우, 중견·중소기업 생태계 전반에 걸쳐 구조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원청 대기업을 정조준한 노조의 투쟁 방식이 노사 간 신뢰를 해치고, 산업 현장의 갈등만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진수 기자 brje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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