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료 산업 개척’ 장수기업, 소재-장비로 사업 확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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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인사이드]

경기도 양주에 본사를 둔 ㈜진웅산업의 김종웅 회장이 걸어온 길은 한국 산업 발전사의 증언이다. 경북 영덕 산간벽촌 출신 소년이 무일푼 상경으로 인생을 개척하고 국내 염료산업을 선도하며 첨단 OLED 소재 기업으로 번창시킨 스토리는 현대 기업가정신의 표본이다.

김종웅 회장
김종웅 회장
1950년대 경북 영덕(옥산) 화전촌.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농가의 차남인 김종웅 소년에게 정규교육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마을 야학 교육(한글, 한자)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맛본 그는 산속에 갇혀 사는 것을 거부했다. 당시 자유당 말기에 이승만 정권의 신교육 정책으로 3년 만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3세의 무모한 도전은 시작부터 시련이었다. 대구행으로 믿고 탄 버스는 부산행이었고 낯선 도시에서 그는 중구 검정다리 아래 빈민촌으로 끌려갔다. “당시 부산에서 버스를 내렸을 때는 앞이 캄캄했다”고 회상하는 그는 온갖 궂은일을 하며 생존해 나갔다. 운명의 전환점은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성실하게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을 본 염료 가게 사장이 그를 점원으로 데려간 것이다. 김 회장은 “너무 힘들 때라 배달이든 뭐든 다 했는데 신문 배달하는 나를 염료 가게 사장이 착하게 봤는지 가게 점원으로 오라고 설득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염료점에서 숙식하고 일하며 야학으로 꿈에 그리던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는 사업주가 수표 관리와 회계 업무까지 맡길 만큼 신임을 얻었다. 군복무 후 서울로 올라와 주간에는 염료 업체 직장인, 야간에는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경기 양주시에 위치한 ㈜진웅산업 본사 전경
1979년 김 회장은 전화 한 대만 달린 사무실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1980년대 수출 붐을 타고 해외 피혁 염료 원료를 들여와 완제품으로 가공해 재수출하는 사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당시에는 한 해가 가면 10배씩 매출이 뛰었다. 매출이 하도 뛰니까 국세청은 물론 정보기관에서도 주목할 정도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러나 수입 의존 구조의 한계는 분명했다. “염료의 국산화가 안 되면 염료산업은 단순히 판매 마진만 챙기는 장사에 불과했다”며 “유럽 회사들의 횡포가 심해 원료의 국산화가 절실했다”고 김 회장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대기업도 주저하던 연구개발에 뛰어들어 자체 연구소를 설립한 것이다. 국내외 화학 전문가들을 영입하고 유럽 퇴직 기술진까지 초빙해 핵심 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그 결과 마침내 염료 완전 자급을 달성했고 1989년 정부로부터 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이때부터 그는 ‘염료산업 개척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창업 46년을 맞은 진웅산업은 연간 4000t 규모의 염료 생산시설을 갖추고 전 세계 피혁 염료 시장 최고 점유율을 기록했다. 김 회장은 1999년 미래 성장 동력으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소재 연구 부문을 신설해 차세대 산업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현재 진웅산업은 OLED 디스플레이 핵심 부품인 CGL(전하생성층) 양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ETL(전자이동층)과 호스트 소재로도 사업 영역을 넓혀가며 세계적 소재 전문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진웅산업은 최근 인수합병을 단행했다. 장수 기업으로의 재도약을 공고히 하고 첨단 부품 제조 전문 기업과 동행을 통해 소재-장비 통합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나려는 계획이다. 김 회장은 “전통 염료 사업이 회사의 든든한 뿌리가 될 것이며 새로운 동반자들과 힘을 합쳐 OLED 중심의 미래 먹거리 창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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