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주요 재건축·재개발 단지 수주 경쟁 과열
건설사, 무제한 이주비 대출 등 과도한 금융조건 제시
“은행도 못하는 대출·초저금리 조건… 정부 정책·규정 상충”
“결국 조합원 부담·사업 지연으로 분쟁 불씨 가능성”
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재건축·재개발 단지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건설사들이 무리한 금융조건을 내세워 조합원을 유혹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집값(감정가 기준)이 20억 원 수준인데 조합원 이주비로 30억 원대(LTV 150% 기준) 대출한도를 제시하거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에 0%를 더한 초저금리 자금지원까지 지금까지 실행된 적 없는 조건을 앞세워 일단 수주부터 하자는 무리수가 이어지고 있는 것. 업계에서는 건설사들의 이러한 행태가 부동산 시장 안정화를 꾀하는 정부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시공사 재무건전성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현실 가능성 없는 금융 ‘덤핑’ 경쟁이 결국 조합과 금융시장 전체에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7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최근 경쟁이 치열한 수주 사업지에서는 LTV 100%를 초과하는 이주비 대출 제안이 기본 옵션처럼 등장하고 있다. 최근 공개된 주요 경쟁 사업지 입찰 제안서를 확인해보면 건설사들이 이주비 대출한도를 감정가의 140~160% 수준으로 설정하거나 심지어 무제한 한도를 내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개포우성7차 재건축 사업에서 삼성물산은 이주비 대여한도를 LTV 100%+α로 제시했다. 일반 금융 기준으로 성립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제안으로 실제로 실행된다면 은행권보다 많은 대출이 건설사를 통해 나오는 셈이다.
정비사업에서 이주비는 기본이주비와 추가이주비로 구분된다. 기본이주비는 조합원들이 각자 주택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는 구조다. 통상 감정가의 50~70% 수준에서 결정되고 법과 규정에 따라 집행된다. 추가이주비는 기본이주비만으로 이주가 어려운 조합원을 위해 추가로 빌려주는 비용을 말한다. 시공사가 조합에 추가사업비로 빌려주는 자금을 기반으로 조합이 조합원에게 부족분을 대출해주는 방식이다. 아파트 담보 대출을 한도가 부족하거나 전세보증금이 부족한 경우에 활용된다. 일반적으로 기본이주비보다 높은 금리가 적용되고 무이자나 저금리 제공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정부는 현재 서울 강남 3구와 용산 등 투기과열지구에서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을 50%로 제한하고 있다. 이는 가계부채 억제를 위한 핵심 정책 중 하나다. 하지만 정비사업에서는 LTV를 초과하는 추가이주비 대출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이를 틈타 일부 건설사들이 경쟁적으로 LTV 100%를 넘는 추가이주비를 제안하면서 무제한 대출까지 나온 것이다.
정비업계에서는 이러한 조건이 현실에서 실행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앞으로도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기관은 담보가치(감정가)를 기준으로 대출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도한 금융조건 제안은 정부의 스트레스 DSR 규제 등 가계부채 관리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일각에서는 과도한 제재를 경계하면서도 건설사들의 무리한 금융조건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건설사들의 이러한 행태가 가계 대출 총량을 억제하고 금융시장 건전성을 확보하려는 기조 속에서 정비사업을 명분으로 사실상 규제 무력화를 조장하는 행위”라며 “제도 신뢰를 훼손하고 부동산 시장에 또 다른 풍선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시공사들이 제시하는 금융조건을 확정된 혜택처럼 포장하면서 조합원들에게 잘못된 기대를 심어주고 이를 통해 시공사 선택을 유도하는 행태가 시장 질서를 왜곡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추가이주비가 투기를 부추기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담보가치보다 많은 현금을 조합원이 확보하게 되면 그 자금이 순수 이주 목적이 아니라 투자자금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커진다”며 “결국 일부 조합원의 투기성 자금이 시장을 자극하고 가격 불안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금융 리스크는 특정 조합원에 그치지 않고 조합 전체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주택 소유바가 집값보다 높은 이주비를 대출 받은 뒤 이를 상환하지 못하면 부족분을 조합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연체나 부실이 발생하면 금융사는 조합을 상대로 자금 회수를 시도하고 조합은 부족분을 분담금 인상이나 추가 대출로 메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단순히 개인 채무를 넘어 전체 조합원 재정리스크로 전가되는 구조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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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범위 벗어난 CD+0% 대여금리… 정부 규정과 충돌 가능성
대여금리도 마찬가지다 정비사업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비현실적인 초저금리 제안이 난무하고 있다. 일부 건설사는 CD금리에 가산금리를 0% 또는 0.1%만 더한 초저금리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통상적 금융 관행을 벗어난 조건이라는 지적이다. 현재 CD(91일)금리는 약 2.6% 수준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제안 금리는 2.6~2.7% 수준에 불과하다. 반면 시중은행 신용대출 금리는 약 4% 수준으로 형성돼 있다. 1% 이상 낮은 비정상적 초저금리인 셈이다.
이러한 초저금리 제안이 국토교통부 정비사업 규정과 충돌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 제30조는 시공과 무관한 금전·재산상 이익 제공 금지, 시중은행 최저금리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 대여 금지 등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CD+0%대 금리는 시공과 무관한 금전상 이익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는 게 정비업계 분석이다. 관련 법령에 저촉될 수 있는 만큼 위법 소지를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결국 무리한 금리 제안은 시공사가 조달할 수 없는 비현실적 금리로 조합원 표심만을 노린 과장된 제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일부 사업지에서는 초저금리를 내세웠던 건설사가 계약 직전에 말을 바꾸거나 슬그머니 조건을 수정한 사례도 있다. 이러한 번복은 조합원 불신을 키워 사업 지연과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은 제도적으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대표적으로 대안설계가 꼽힌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는 실현 가능한 설계만 제안하도록 제도적 기준을 마련해 적용 중이다. 특히 서울시가 주도하는 ‘신속통합기획’은 정비계획의 주요 골격을 고정하고 시공사의 제안 범위를 외관, 평면, 조경 등 일부 항목으로 제한하는 구조를 정립했다. 용적률, 층수, 건폐율 등 핵심 인허가 항목은 변경 불가 대상으로 명확히 규정되고 사업 초기부터 실현 가능한 설계만 유도하도록 하고 있다. 현실성 없는 설계 제안으로 인한 사업 지연과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취지다.
이처럼 대안설계에서 ‘실현 가능성’이 핵심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는 만큼 금융 조건도 동일한 원칙 아래 관리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 한 사업지에서는 무리한 금융 제안을 사전에 걸러내기 위해 입찰지침서에 ‘LTV 100% 초과 불가’ 등의 조건을 명시해 과열 경쟁 차단에 나서기도 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시공사가 실제 지급보증을 통해 조달 가능한 금리는 CD+1~2% 정도가 일반적인 수준으로 CD+0%는 자칫 시장 질서를 교란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며 “이러한 행태에 대해 정부 차원 제도적 기준 정립과 제재 필요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실현 가능한 금융조건만으로 경쟁이 이뤄져야 사업 신뢰성과 지속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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