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으로 치이는 韓기업]
새로운 미래 먹거리 투자 급한데… 기업들 “주주 소송 당할라” 몸사려
與, 경영 발목 상법-노란봉투법 예고… 李대통령 친기업 행보와 엇박자
더 센 상법 앞두고 “방어수단 마련을”
국내 배터리 기업 A사는 최근 전기차 캐즘(수요 정체) 극복을 위한 포트폴리오 전환 차원에서 북미 투자 확대를 검토해 왔지만 난관에 부딪혔다. 새로운 투자가 미래 먹거리를 위한 장기 투자인 만큼 단기 실적에는 악재가 될 수 있는데, 이사의 충실 의무가 확대된 개정 상법에 따라 소액 주주들이 줄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관세 협상 때문에 미국 투자를 늘리는 게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개정 상법에 따른 소송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 美 관세발 실적 악화에 대미 투자 청구서까지
일본이 예상보다 많은 5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약속을 통해 미국과 상호 관세율을 내리는 데 합의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대미(對美) 투자 압박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주부터 이례적으로 기업 총수들을 연이어 독대하고 있는 것도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앞두고 기업들의 대미 투자 계획을 점검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미국의 관세 폭탄과 내수 침체로 이미 기업들의 실적이 저하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재계의 반응이다. 2분기(4∼6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반 토막이 났고 현대차와 기아도 각각 15.8%, 24.1% 이익이 급감했다. 게다가 최근 상법 개정에 따른 규제 위험도 투자 확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무리하게 신규 투자를 단행했다가, 실적이 악화될 경우 주주 소송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기업들은 정부가 계속 신규 투자를 압박하고 정치권에서는 대규모 투자 등 기업 경영을 제약하는 규제를 쏟아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관세 인하나 경기 활성화를 위한 투자 확대는 정부와 기업 모두에 필요하지만, 이로 인한 주주 소송이나 파업 리스크는 기업이 홀로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B사 관계자는 “실적 악화로 인해 이미 계획된 투자도 중단하려는 상황”이라며 “만일 투자 결과가 좋지 못할 경우 현행법상 이사들이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하는 구조인데,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기업들이 결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C기업 관계자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상황에서 투자 규모를 더 늘리기엔 한계가 있다”며 “증액도 문제지만 계획대로 투자하지 않았을 때 어떤 페널티를 물게 될지도 걱정”이라고 했다.
정부와 여당의 기업들에 대한 규제 압박은 계속 커지는 양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당선 직후 기업 총수들과 만나 “기업이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며 친기업 행보를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반대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확대 등을 포함한 1차 개정 상법이 15일 공포된 데 이어,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를 담은 2차 상법 개정안도 8월 초 본회의 처리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또 사용자 범위를 확대하고 노조의 불법 파업 등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노동조합법 개정안(노란봉투법)까지 예고하면서 기업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조선업계는 기본적으로 100여 개의 하청업체나 협력사들과 생태계를 이뤄 일해야 하는 업종”이라며 “이 업체들이 각각 원청업체와의 교섭권을 요구하면 극심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도 “노조의 사장실 점거 같은 ‘선을 넘는’ 강경 투쟁이 철강업계 노조에서는 매우 빈번하다”며 “노란봉투법으로 이 같은 행위에 면죄부를 주면 ‘용광로 정지’ 같은 최악의 카드까지 노조가 손쉽게 손대려 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여기에 국내 기업들이 사실상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사용해 온 자사주를 의무적으로 소각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추진되면서 상장사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 상장사 대표는 “자사주 소각으로 인한 주가 상승 효과는 일시적인 반면 이로 인해 기업 경영권이 넘어가면 영영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도입한다면 동시에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 수단도 함께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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