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 모리스 창이 들려주는 좌절을 투지로 바꾼 TSMC 이야기[딥다이브]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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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아메리칸드림에 좌절한 동양인. 5년 동안 세 번 사직서를 내야 했던 실패한 관리자. “그는 이제 끝났다”는 얘기를 듣던 50대 후반.

반도체 산업의 거물 모리스 창. 그는 대만 TSMC 설립 초기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이대로 기술업계를 떠나야 하나, 좌절에 휩싸였던 그 시절. 그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며 오히려 투지를 다집니다. 그리고 업계의 수많은 거절과 비웃음, 주기적으로 닥치는 경제 위기를 헤쳐가며 TSMC의 놀라운 성공 신화를 써갔죠.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어떻게 훗날 성공의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 모리스 창이 93세 나이에 직접 쓴 자서전을 들여다봅니다.
(모리스 창이 1963년 이후 삶에 대해 쓴 자서전 ‘하편’은 2024년 12월 대만에서 중국어(번체자) 판으로 발간됐습니다.)
모리스 창은 2024년 말 발간한 자서전에서 40, 50대 시절 직장에서 겪은 좌절이 훗날 TSMC 경영의 자산이 됐다고 말한다. 동아일보DB
*이 기사는 8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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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실패
중국 본토 출신의 미국 이민 1.5세대인 모리스 창. 그가 25년 몸담은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건 1960년대~70년대 초였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TI는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했고, 그는 업계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았죠.

하지만 1970년대 후반, TI 경영진이 바뀌고 회사가 점점 대기업화되면서 모리스 창의 사내 입지는 급격히 좁아집니다.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늘리자고 강하게 주장한 그는 단기 실적에 매몰된 상사들과 번번이 갈등을 빚었죠. 인텔이라는 막강한 경쟁자가 부상하면서, 모리스 창은 기술개발에서도 무능하다는 낙인까지 찍힙니다.

반도체 총괄에서 소비재 총괄로, 다시 ‘품질 책임자’란 낯선 직책으로 떠밀렸던 1982년. 그는 여전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인사팀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습니다. ‘직급이 현재의 42단계(수석 부사장, 넘버3)에서 38단계(초급 부사장 수준)로 하향조정됐다’는 통보였죠.

납을 아무리 윤이 나게 닦는다고 금으로 만들 순 없구나. 모리스 창은 자신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TI를 1983년 떠납니다. 25년간 자신의 전부처럼 여겼던 회사와의 작별이었죠.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에서 근무하던 젊은 시절의 모리스 창. 자신만만했던 그 시절 모리스 창의 목표는 언젠가 TI의 CEO가 되는 것이었다. 1998년 출간된 모리스 창 자서전 ‘상편’ 속 사진.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에서 근무하던 젊은 시절의 모리스 창. 자신만만했던 그 시절 모리스 창의 목표는 언젠가 TI의 CEO가 되는 것이었다. 1998년 출간된 모리스 창 자서전 ‘상편’ 속 사진.
이어서 구한 직업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의 사장 겸 COO. 여기선 기존 멤버인 부사장들과 갈등만 빚다 1년 만에 사실상 쫓겨납니다. CEO는 그에게 사임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죠. “부하 중 아무도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뉴욕 5번가 트럼프타워 53층 집에서 홀로 지내던 53세 이혼남 실업자. 그에게 대만 ITRI(산업기술연구소) 원장직 제안이 들어옵니다. 대만은 출장으로 몇 번 가본 게 전부인 생소한 나라였지만, 그 점이 오히려 도전정신을 자극합니다. “이름을 날릴 마지막 기회”라며 대만으로 날아갔죠.

하지만 대만 ITRI 원장을 맡았던 3년(1985~1988년)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개혁가’라고 칭하며 미국식의 과감한 조직 개혁을 외쳤는데요. 개혁은 벽에 부딪혔고, 핵심 인력은 줄줄이 떠나갔고, 그의 평판은 추락합니다. 1988년 그는 스스로 원장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투지
세 번의 사직, 세 번의 실패. 그 시절 모리스 창은 ‘피터의 법칙(모든 직원은 무능할 때까지 승진한다, 즉 승진할수록 무능해진다)’의 대표 사례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딱 하나. 바로 ITRI 원장직과 겸임해 온 TSMC 회장 겸 CEO라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는 대만에 온 직후인 1985년 정부 요청으로 세계 최초의 ‘전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 설립계획을 마련했었죠.

당시 모리스 창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인텔,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모토로라, 파나소닉, 소니 등)에 접촉해 투자를 요청했고요(답변은 하나같이 “관심 없음”). 간신히 네덜란드 기업 필립스의 투자를 받아내는 데 성공해 TSMC를 설립했는데요.

1987년 제1공장 가동을 시작한 TSMC. 하지만 고객이 없었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첫해 매출은 고작 400만 달러로, 그가 세웠던 사업계획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죠.
1990년 가동을 시작한 TSMC 제2공장의 모습. 모리스 창은 2공장이 TSMC에 ‘황금의 90년대’를 열어줬다고 말한다. TSMC 제공
대만 경제계 인사들조차 TSMC의 야심 찬 계획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좋은 서비스”로 승부하겠다는 모리스 창 말에 당시 대만 중앙은행 총재는 비웃듯 말합니다. “대만 기업이 선의로 경쟁한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군요.”

그러나 모리스 창은 인생 어느 때보다 열의에 불탔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TSMC를 경영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식, 경험, 판단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 투지입니다. 60세가 되기 전 10년 동안 저는 TI,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ITRI, 이렇게 세 곳에서 사직했습니다. 사직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거였죠! 세 번이나 사직한 후, 저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고 느꼈고 투지를 더욱 다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혔지만, 저는 패배를 인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패했지만 다시 일어날 용기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투지. 그가 2018년 87살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그는 이전의 부정적인 경험이 TSMC에선 오히려 자산이 됐다고 말합니다. “제가 겪은 사업 경험 중 많은 부분은 부정적이지만, 부정적인 교훈이 긍정적인 교훈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아는 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실패가 영감을 준 TSMC 설립
모리스 창의 TSMC 설립 스토리 중 가장 극적인 건 1985년 대만 정부의 요청(반도체 기업 설립 계획을 짜달라)을 받은 지 겨우 3주 만에 전문 파운드리 기업 설립계획을 세워서 대만 행정원장에게 발표했단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TI에서 무시당했던 자신의 보고서가 TSMC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1981년 모리스 창이 TI에서 ‘품질 책임자’로 사실상 강등됐던 시절. TI CEO는 일본 공장의 수율(정상제품 비율)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일본 공장 수율이 40~50%로 미국 휴스턴 공장의 20%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죠. CEO 요청으로 두 공장을 들여다본 모리스 창. 결국 사람이 문제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일본 공장은 이직률이 대단히 낮았고(연 2%), 생산라인에 공대를 졸업한 우수한 인력이 많았죠. 이에 비해 미국은 이직률이 너무 높은 데다(25%), 생산현장에서 일하려는 공대 졸업생을 찾기란 불가능했습니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수율’을 잡으려면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진은 TSMC 공장 내부 모습. TSMC 제공
모리스 창은 반도체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수율’을 잡으려면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진은 TSMC 공장 내부 모습. TSMC 제공
그러나 이 분석 결과를 CEO에 보고했을 때 돌아온 답은 차가웠습니다 “난 수율을 즉시 끌어올릴 해결책이 필요해. 그 분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TI에서 그가 쓴 마지막 보고서는 이렇게 그냥 묻히고 맙니다.

그리고 1985년 대만 ITRI 원장으로 부임한 모리스 창. ITRI가 시범 운영 중인 웨이퍼 생산 ‘데모 라인’이 상당히 뛰어난 수율을 기록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수율의 중요성을 잘 아는 그는 이게 대만의 독보적인 강점이 될 수도 있다고 봤죠. 정부가 그에게 반도체 사업 계획을 요청했을 때, 그는 확신을 가지고 전문 파운드리 사업 모델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해고는 없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건 모리스 창의 중요한 경영철학입니다. 그래서 그가 TSMC에서 세운 원칙 중 하나가 ‘해고는 없다’는 거죠.

경기침체가 닥쳤던 1970년.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는 직원의 약 10%를 해고하기로 했습니다. 대다수 경영진은 당연히 실적이 가장 낮은 직원을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런데 당시 집적회로 사업부를 이끌었던 모리스 창은 이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그는 실적이 아닌 근속연수를 기준으로, 즉 가장 최근에 채용된 직원부터 직급에 상관없이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왜? 어느 기업이나 직원 실적은 사실은 상사의 실적입니다. 그런데 실적을 기준으로 상사가 아닌 직원을 해고한다? 그건 공정하지 않고, 직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죠. 차라리 근속연수가 훨씬 더 납득할 만한 객관적 기준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TI는 모리스 창의 이 주장을 받아들였는데요.
2001년 포브스 표지모델이 된 모리스 창. 포브스가 그에게 붙여준 타이틀은 ‘촉매자’였다.
2001년 포브스 표지모델이 된 모리스 창. 포브스가 그에게 붙여준 타이틀은 ‘촉매자’였다.
닷컴 버블이 꺼지고 경기침체가 시작된 2001년. TSMC를 이끌던 모리스 창은 이런 TI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경기 침체기 해고 금지’라는 원칙을 세웁니다. “저는 일본 기업의 종신고용 전통이 직원 충성도를 높인다고 믿습니다. 또 만약 해고 뒤 1년 안에 신규 채용이 필요하다면, 해고는 경제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퇴직금은 1년 치 급여의 약 절반이고, 신입사원 교육 비용도 1년 치 급여의 절반이니까요.”

하지만 이후 TSMC에서 이 원칙은 와장창 깨지고 맙니다. 모리스 창이 CEO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2009년 1월의 일이었죠. 금융위기 폭풍이 몰아치며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자, 차이리싱 당시 TSMC CEO(현 미디어텍 CEO)는 성과평가가 가장 낮은 840명을 해고해 버립니다.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칩니다. 해고자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모리스 창 회장의 집 앞까지 찾아와 시위를 벌입니다.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고요. 결국 보다 못한 모리스 창이 직접 나서서 해고자 복귀를 결정합니다. 직원들에겐 “성과평가를 해고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고요. 이 해고 사건을 계기로 모리스 창은 4년 만에 다시 CEO직으로 복귀했죠.

“해고는 모든 직원이 좌절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해고되지 않은 직원들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회사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건가?’ ‘최고 경영진은 직원을 마치 비용처럼 취급하나?’ 그리고 ‘이런 회사에 계속 남아야 할까’라고 의구심을 가집니다. 저는 TSMC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둘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직원을 해고해야 하죠?”

애플과 엔비디아, 그리고 젠슨 황
모리스 창은 TSMC가 ‘제조 서비스 사업’을 하는 기업이라고 강조합니다. 단순히 제조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고객인 팹리스 기업(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의 요구에 맞춰 서비스하는 게 핵심인 거죠. 그가 꼽는 가장 중요한 경영철학이 바로 “고객은 파트너”라는 건데요.

그래서 그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건 고객과의 소통입니다. 고객사와 TSMC 양측의 엔지니어가 제 3자를 통할 필요 없이 직접 소통해서, 신뢰를 강화하라는 거죠. 모리스 창 본인 역시 2018년 은퇴할 때까지 상위 15~20개 고객사 CEO를 최소 1년에 한두 번 방문하곤 했습니다. 주요 고객사 순위가 수시로 바뀌고 CEO도 계속 교체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했죠. 그는 고객사 CEO와의 관계에서 필요한 ‘친밀함’의 기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서로에게 전화할 수 있고, 상대방이 꼭 전화를 받을 거라는 것”.

TSMC의 여러 주요 고객사와 인연 중 애플과 엔비디아에 대한 내용은 특히 눈에 띕니다. TSMC는 2007년 아이폰 첫 출시 때부터 애플을 눈여겨봤지만, 당시 애플은 자체 설계한 칩의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겼죠. 이후 2010년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에 진출한 걸 본 모리스 창은 기회를 포착합니다. 그는 “스티브 잡스라면 이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느꼈을 것”이라고 회고했죠. 그해 11월, 재혼한 아내의 사촌인 폭스콘 창업자 궈타이밍이 제프 윌리엄스 애플 부사장(COO)을 데리고 그의 집을 찾아옵니다. 드디어 애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애플과의 협상은 인텔의 참전으로 일시 중단됩니다. 팀 쿡 애플 CEO가 인텔과의 협상에 나섰기 때문이었죠.

모리스 창은 실리콘밸리로 찾아가 직접 팀 쿡을 만납니다. 이 자리에서 팀 쿡 CEO는 이런 묘한 말을 합니다. “그들(인텔)은 파운드리에 서툴러요.” 역시나 얼마 뒤 애플과 인텔의 협상을 깨졌고, 애플은 TSMC를 선택했죠.

이때 애플을 놓친 건 인텔의 몰락을 부추긴 큰 패착이었습니다. 반대로 TSMC는 애플을 잡으면서 파운드리의 절대 강자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됐고요. 이후 인텔의 당시 경영진은 애플이 너무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고 여겨서 협상을 깼다고 밝혔는데요.

모리스 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팀 쿡이 제게 한 말, ‘인텔은 파운드리에 서투르다’와 같은 맥락입니다. 고객이 수용할 가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파운드리에 서투른 것과 마찬가지죠. TSMC는 고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으로 적정한 수익을 낼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모리스 창 자서전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언급됩니다. 1997년 젠슨 황은 모리스 창에게 ‘파운드리를 찾고 있는데, 직접 만나 뵙고 싶다’고 불쑥 편지를 보냈고요. 며칠 뒤 캘리포니아에 간 모리스 창이 그에게 전화를 겁니다. 전화를 받은 젠슨 황은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고 이렇게 소리쳤죠. “조용히! 조용히! 모리스 창이 전화했어!”
모리스 창은 자서전에서 젠슨 황에 대해 “30살 넘게 차이 나고 1만㎞ 넘게 떨어져 살지만, 절친처럼 소통한다”고 썼다. 사진은 함께 대만의 음식점을 찾았던 모리스 창과 젠슨 황의 모습. 뉴시스
모리스 창은 자서전에서 젠슨 황에 대해 “30살 넘게 차이 나고 1만㎞ 넘게 떨어져 살지만, 절친처럼 소통한다”고 썼다. 사진은 함께 대만의 음식점을 찾았던 모리스 창과 젠슨 황의 모습. 뉴시스
1998년 TSMC는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엔비디아(당시 직원 수 약 80명)에 직원 두 명을 한 달 동안 파견해 돕는 이례적인 고객 서비스를 제공했고요. 이런 협력을 기반으로 엔비디아는 눈부신 도약을 시작합니다. 모리스 창은 젠슨 황을 ‘절친’이라고 칭하죠.

그는 한때 젠슨 황을 자신의 후계자 후보로 생각했었다는 점도 자서전에서 공개했는데요. 2013년 젠슨 황을 직접 만나 의사를 타진해 봤다고 합니다. 모리스 창은 약 10분에 걸쳐 TSMC의 눈부신 성장 전망을 설명했고요. 이어 TSMC CEO가 되면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젠슨 황의 지금 소득보다 훨씬 많을 거라고 얘기했죠.

그때만 해도 엔비디아 시가총액이 TSMC의 10분의 1에 그쳤던 시절입니다. 그러니 젠슨 황이 이런 제안에 관심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게 그리 무리도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 젠슨 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 이미 일이 있어요.”

이제 엔비디아는 세계 시가총액 1등의 어마어마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모리스 창은 그때 그 장면을 회고하며 이렇게 감탄하죠. “젠슨은 내게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그는 ‘이미 일이 있어요’라고 답했죠! 그가 말한 ‘일’이란 엔비디아를 11년 후인 오늘날 모습으로 성장시키는 거였습니다!” By.딥다이브
모리스 창은 1998년 인생 초반기를 다룬 자서전 상편을 낸 지 26년이 지난 2024년에 하편을 출간했다. 하편은 약 30만자(한국어로는 약 33만자 이상)에 달하는 분량이다.
모리스 창은 1998년 인생 초반기를 다룬 자서전 상편을 낸 지 26년이 지난 2024년에 하편을 출간했다. 하편은 약 30만자(한국어로는 약 33만자 이상)에 달하는 분량이다.

<부록>
모리스 창은 자서전에서 삼성전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전자 관련 챕터는 딱 하나뿐인데요.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급부상하던 1989년,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입니다.

모리스 창은 타이베이를 방문한 이 회장 초대로 아침 식사를 함께하게 됐는데요.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엔 너무 많은 자본과 인재가 필요한 데, 대만은 이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포기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울러 대만이 정말 메모리 산업에 진출하고 싶다면 삼성과 협력하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도 덧붙였죠.

당시 대만 기업들은 메모리 시장 진출을 노리던 중이었거든요. 이를 눈치챈 이 회장이 괜히 나설 생각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그를 만났던 겁니다.

몇 달 뒤, 모리스 창은 이건희 회장 초청으로 방한해 삼성전자 공장을 둘러봅니다. 일행 중엔 당시 메모리 시장 진출을 모색했던 에이서의 스탠 시 회장도 포함됐죠. 모리스 창은 미국이나 일본 경쟁사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삼성전자 공장과 엔지니어 모습을 보고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고 합니다. “메모리 산업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옮겨가고 있구나”라는 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후 에이서는 포기하지 않고 메모리 사업에 진출했는데요. 결국 삼성과의 경쟁에서 처절하게 패배하고 1999년 사업 철수를 결정합니다. 모리스 창은 당시 이 회장의 조언이 맞았다고 회상합니다. 동시에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삼성이 이기고 대만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다고 분석하죠. 그건 바로 ‘학습 곡선’. 반도체 산업은 생산 경험이 쌓일수록 비용경쟁력이 높아지는 ‘학습 곡선 효과’가 뚜렷한 산업인데요. 1990년대 삼성전자는 이미 학습 곡선에서 한참 앞서나가고 있었던 겁니다.

*이 기사는 8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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