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인사이트] 엔지니어링 시장 90% 독점 논란, 상대평가 제도 14년째 지속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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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고시 개정 또는 수주 상한제 30~40% 도입” 해결책 제시

2011년 도입된 ‘엔지니어링 사업자 선정에 관한 기준’이 법적 구속력을 갖춘 채 14년간 지속되면서 화력발전 계측제어설비 정비용역 시장에 극단적 독과점 현상을 야기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계측 정비용역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특정 상위 1개 업체가 전체 프로젝트의 90% 가까이 독식할 수 있는 구조가 ‘법적 의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면서 공정 경쟁 질서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수십억 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에서 PQ(Pre-Qualification·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제도) 점수가 당락을 좌우하는 절대 기준이 되면서 실적 순위가 낮은 기업들은 경쟁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이는 기술력과 경영 상태보다 과거 실적만이 절대 기준이 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경영 상태 평가에서 상당한 감점을 받은 업체가 실적 1위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낙찰받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상황이 14년간 지속되면서 업계 생태계 자체가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소기업들의 성장 기회는 원천 차단되고 혁신보다는 실적 쌓기에만 매달리는 경직된 시장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매년 수백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에서 같은 업체들만 수주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하다”며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업체가 실적 순위 때문에 아예 기회를 얻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가 심각하다”고 토로했다.

법적 구속력으로 강요되는 구조적 문제

이 고시는 ‘엔지니어링산업 진흥법’ 제28조 제1항과 동법 시행령 제37조에 근거해 발령된 것으로 법규적 효력을 갖는다. 한수원 및 발전 5개사(남부발전, 중부발전, 서부발전, 동서발전, 남동발전)는 원칙적으로 고시를 따라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

상대평가 시 5% 차등 규정은 발주처가 임의로 조정할 수 없다. 고시 위반 시 입찰 참가자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산업통상자원부는 시정명령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전 고시(2020년 11월 26일)에서는 제4조(기타사항)의 ①항에 의거, 예외사항이 있어 발주자가 유연하게 고시를 적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5월 13일 고시 개정에서 예외사항 조항이 삭제돼 무조건 발주자가 고시 내용을 준수하도록 강화됐다.

한수원 및 발전 5개사가 이와 같은 고시를 의무 적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독과점을 조장하는 불합리한 고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공정 경쟁을 저해하는 심각한 문제다.

1.4점 가점의 압도적 우위 메커니즘

한수원 계측 정비용역의 경우 현행 고시는 5년간 사업실적을 합산해 순위를 매기고 순위 간 5%(PQ 점수 0.8점) 격차를 두는 상대평가 방식을 적용한다. 여기에 당해 발전소 운영업체에 대한 가점 0.6점이 더해지면서 실적 1위 업체는 사실상 경쟁이 불가능한 1.4점의 가점을 받아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당해 발전소 가점 제도는 원래 기술력 향상을 목적으로 도입됐다. 발전소마다 특성이 달라 같은 발전소를 지속적으로 정비하면 기술자들이 해당 발전소 특성을 잘 알게 돼 더 높은 기술력으로 정비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당해 발전소 가점 0.6점에 상대평가 0.8점이 더해져 1.4점의 압도적 우위를 만들어내고 있다. 실적 1위 업체는 당해 발전소의 경우 타 입찰 회사보다 1.4점의 가점을 받는 반면 다른 업체는 당해 발전소에서도 0.2점 감점돼 불리하다.

실적 1위 업체의 경우 자기 운영 발전소는 거의 낙찰되고 타 업체가 운영하는 발전소 용역까지 빼앗을 수 있는 ‘경쟁이 아닌 경쟁구조’다. 이는 기술력이나 가격경쟁력과 무관하게 독과점하는 시스템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14년간 지속된 독과점, 구체적 수치로 입증

2012년 이후 화력발전 계측 정비용역 수주 현황이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최근 총 9건의 프로젝트 중 상위 2개 업체가 8건(88.9%)을 독식했다. A사가 당진1호기, 하동2호기, 영흥2호기, 삼천포 등 4건(55.6%)을 수주했고 B사가 당진2·3호기, 태안3호기 등 3건(33.3%)을 따냈다. 3위 C사는 평가점수를 0.8점에서 0.3점으로 낮춘 영흥 1건(11.1%)만 수주할 수 있었다.

주목할 점은 A사가 경영상태 평가에서 -0.82점이라는 상당한 감점을 받았음에도 1위 지위를 유지하며 낙찰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현재 시스템에서 실적 순위가 기술력이나 경영 상태보다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기술력보다 실적이, 현재 역량보다 과거 성과가 우선되는 기형적 구조”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수원 계측 정비용역의 경우 현재 3%(PQ 점수 0.5점) 격차에서도 1위 업체가 14개 발전소 중 7개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5%(0.8점) 적용 시에는 모든 발전소를 낙찰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특히 10억 원 이상 대형 사업에서는 PQ 점수가 70%를 차지해 평가 방식의 영향이 더욱 크다.

실적 1위 업체와 하위 업체 간 격차가 워낙 커 상대평가 3%를 적용한 지난 입찰에서는 하위 업체들이 아예 경쟁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14개 발전소 중 7개 발전소에서 경쟁입찰이 성사되지 않아 수의계약으로 진행됐고 이는 결국 발주자에게 손해를 끼쳤다. 상대평가를 5%로 확대 적용할 경우 이런 수의계약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상대평가 도입과 예상치 못한 부작용

2011년 지식경제부가 고시 제2011-182호를 통해 도입한 상대평가 방식은 품질 향상을 목적으로 했다. 당시 정부는 “우수한 업체가 더 많은 기회를 얻어 전체적인 서비스 품질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실제 적용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상대평가 시스템이 도입되자 시장 진입장벽이 높아졌고 기존 상위 업체들의 독과점이 고착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0.8점이라는 점수 격차가 실제 입찰에서는 거의 극복 불가능한 벽으로 작용했다.

14년간 지속되면서 중소기업들의 성장 기회는 원천 차단되고 혁신보다는 실적 쌓기에만 매달리며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만 몰입하는 경직된 시장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기술력과 경험은 충분하지만 실적 순위 때문에 대형 프로젝트 참여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투자와 혁신 의욕이 크게 떨어졌다”고 토로했다. 에너지 전문가는 “독과점 및 수의계약(약 150억 원 예측) 증가로 인한 비효율이 결국 전력 요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두 차례 개정 시도 좌절과 이중 잣대 논란

상대평가의 문제점은 이미 두 차례의 공식적인 검토 과정에서 충분히 입증됐다. 2016년 1차 개정 시도는 C사와 D사가 산업통상자원부에 고시 개정을 청원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청원서에는 ‘상대평가로 인한 시장 경직화와 혁신 저해’가 핵심 문제로 지적됐다.

이를 계기로 9월부터 12월까지 산업통상자원부 주관으로 한국엔지니어링협회가 타당성 용역을 수행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엔지니어링협회, 발전 5개사, 계측업체가 참석한 공청회에서 상대평가에 따른 실적 1, 2위 업체 독점의 불합리성을 인정하고 절대평가로의 전환에 합의했다.

당시 곧 시행될 예정이었던 태안1·2발전소, 하동1발전소 입찰에서는 이 최종안을 적용하기로 하고 최종안에 의거 입찰해 하동1발전소의 경우 최하위 순위 10위 업체가 낙찰됐다.

그러나 2017년 1월 산업통상자원부가 명확한 사유 없이 최종안 적용을 보류했다. 이후 화력의 경우 1.5%를 적용 입찰했으나 한수원 계측 정비용역 입찰에서 3% 상대평가를 적용함으로써 지속적인 문제가 야기됐다.

2024년 2차 개정 과정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8개월간의 논의 끝에 외부 전문기관이 절대평가 도입을 추천했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소수의 선점 업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참석자가 절대평가를 주장했고 발주청인 한수원까지 절대평가를 지지했음에도 결국 대형 용역에서 상대평가가 유지됐다.

업계에 따르면 한수원은 지난해 6월 워크숍에서 계측 정비용역 차기 계약부터 협력사 기술력 향상을 위한 계약법 개선, 절대평가 적용, 수주 상한제 도입을 통한 특정 1위 업체의 독과점 방지를 발표했으나 무산된 상태다.

최종 개정안은 아무런 사유 없이 비파괴 용역 분야는 예외로 절대평가를 도입하고 계측제어 분야는 여전히 상대평가를 적용하는 이중 잣대로 제도를 채택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같은 한수원이 발주하는 방사선 관리 용역의 경우 상대평가를 적용하지만 순위 간 격차를 0.5%로 제한하고 수주 상한제를 적용해 한 회사가 3개 이상 수주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유독 계측 정비만 이렇게 불합리한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며 “같은 엔지니어링 용역인데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책의 공정성과 일관성을 위한 해결책 모색

국내에서도 국토교통부의 건설 엔지니어링 분야를 비롯해 다른 분야에서는 상대평가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추세다.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절대평가를 권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외 선진국 대부분이 절대평가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은 공정성과 경쟁성 확보를 위한 세계적 추세”라며 “한국만 상대평가를 고집하는 것은 시장 왜곡과 소수 독과점 구조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업계는 현실적인 3단계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순위는 고시를 재개정해 절대평가로 전면 전환하는 것이다. 외부 전문기관 연구 용역에서도 절대평가 도입을 추천한 만큼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순위는 고시 개정이 어려울 경우 수주 상한제(CAP) 도입이다. 전체 물량의 30∼40% 수준에서 상한선을 둬 한 업체의 독과점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이미 방사선 관리 용역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를 계측정비 용역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면 된다.

△3순위는 현행 상대평가를 유지하더라도 순위 간 격차를 최소화(0.5% 이하)해 당해 발전소 가점(0.6점)보다 낮은 수준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수주 상한제에 대한 업계의 관심이 높은 것은 이것이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독과점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면적인 제도 개편이 어렵다면 최소한 시장 독과점은 방지해야 한다”며 “30∼40% 상한제만 도입해도 3∼4개 업체가 고르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 종사자들은 “한수원 등록 요건을 만족하고 100억 원 이상 실적을 쌓은 업체들의 기술관리 능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됐다”며 “더 이상 상대평가로 우열을 가릴 필요성이 적다”고 입을 모은다.

아울러 “회사 규모, 즉 실적이 높다고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직원들의 기술력이 높아야 한다”며 “한수원 업체 등록으로 인증된 회사이고 적정량의 실적을 갖춘 회사라면 충분히 잘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4년간 이어진 이 논란을 종식시키려면 정부가 공정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두 차례에 걸친 개정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와 합의를 거쳤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업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장의 건전한 경쟁 생태계 조성과 중소기업의 성장 기회 확대를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정부의 개혁 의지와 함께 대한민국 엔지니어링 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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