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말이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많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정하면 이런 반응이 나온다.
“그러면 왜 돈을 쌓아놓고 있나. 돈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좋지 않나.”
중요하지 않다면서 돈이 많은 건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이라는 얘기다. 돈이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면 돈을 벌려고 하지 말아야 하고, 돈을 모으려고도 하지 말아야 하며, 있는 돈도 다 써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다≠없어야 한다 그런데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과 돈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과연 같은 뜻일까. 이에 대해서는 로마시대 정치가이자 철학가인 세네카가 이미 논의한 바 있다.
세네카는 네로 황제 시대 집정관으로 네로가 아직 어려서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때 로마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인물이다. 네로가 정치를 시작한 이후 정치권에서 쫓겨났지만 사실 세네카가 현대까지 이름을 알린 건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철학가로서다.
세네카는 대표적인 스토아학파 철학자다. 스토아 철학은 서양 철학의 주요 사조 중 하나로, 세상에 대한 초연함과 평정심을 바탕으로 개인의 내면적 행복을 추구한다. 플라톤 철학이 현실보다 이상 세계를 중시한다면 스토아 철학은 현실 중심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세네카의 대표 저서로 ‘행복론’이 있는데, 이 책에서 돈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자.
먼저 세네카는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스토아학파 철학자에게 돈에 얽매이는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마음에 달린 문제이지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게 그들 주장이다.
돈이 별로 없는 사람이 돈이 중요치 않다고 얘기하는 건 일리가 있다. 스토아학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않았다.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가끔 돈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으면서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많은 돈을 벌고 있고 계속 벌고자 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이건 위선 아닐까.
또 정말 돈이 중요치 않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팍팍 나눠 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돈을 모아 부자가 되거나 부자인 상태로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누구보다 돈을 추구하는 것 같은데도 겉으로는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건 일종의 거짓말이고 사기 아닐까.
이런 의문들에 세네카는 이렇게 답한다. “현인은 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부를 선호하는 것이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돈을 가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돈에 매달리지 말라는 의미다.”(‘행복론’ 21장)
걸어가는 인생, 마차 타는 인생 먼 길을 떠난다고 해보자. 걸어갈 수도 있고,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마차를 타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차를 타든, 타지 않든 목적지에는 다다를 수 있다. 그러니 마차는 절대적인 목적이 아니고, 사랑하는 대상도 아니며, 어쩌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존재다. 하지만 마차를 타고 가면 걸어서 가는 것보다 더 편리한 게 사실이다. 그러니 마차를 탈 수 있으면 타는 편이 낫다. 돈은 마차와 같다. 있어도 없어도 인생이라는 먼 길을 가는 게 가능하지만, 있으면 좀 더 편안하게 갈 수 있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며 돈이 없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건 목적지까지 가는 데 마차의 유무는 중요치 않으니 필요 없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마차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있는 것을 일부러 부수거나 없앨 필요는 없다. 마차는 있으면 편리하고 좋다. 인생의 목적은 아니지만 좋은 수단이 된다. 그래서 마차를 적절히 관리해 잘 움직이도록 보전하는 것이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갈 때도 바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어서 가면 된다. 하지만 바람이 있으면 노를 젓지 않고도 편하게 배를 움직일 수 있다. 뱃사람에게 바람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하지만 바람을 반기고 잘 이용하려 한다. “현인은 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부를 선호하는 것”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다.
돈은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돈이 있으면 인생이 좀 더 편해진다. 먼 길을 가는 사람이 마차를 타고 뱃사람이 바람을 찾듯이,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돈을 벌고 모으려 할 수 있다. 그래서 세네카는 이런 결론을 낸다. “부유함은 현인에게 자극을 주고 사기를 드높일 수 있다. 마치 항해할 때 순풍이 그러하듯. 겨울 혹한에 좋은 날씨와 양지바른 장소가 그러하듯.”(‘행복론’ 22장)
그런데 누군가 세네카에게 묻는다. “현인도 부를 추구하고 보통 사람도 부를 추구한다면 현인과 보통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 않나.” 이에 대한 세네카의 대답은 이렇다. “현인은 부의 주인이나 보통 사람들은 부의 노예다.”
현인에게 돈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돈은 인생의 여러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있으면 좋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가진 재산이 없어져도 상관은 없다. 오히려 자기가 평소 하던 일에 집중하거나 아예 다른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스 철학자 제논은 배가 난파돼 자신의 전 재산이 바다에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운명이 나더러 덜 방해받으면서 철학에 몰두하라고 명령하는구나.”(‘행복론’ 14장)
모든 재산을 잃었다고 인생이 망한 건 아니다. 특별히 불행한 일이 닥친 것도 아니다. 제논처럼 재산 관리에 신경 쓰지 않고 원래 하던 철학 연구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부의 주인일 때만 부의 상태에 따라 행동이나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돈이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렇지 않다. 배가 난파돼 전 재산을 잃으면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인생 방향이 흐트러진다. 절망에 빠지고 삶 자체를 잃어버린다. 돈, 재산에 따라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 이건 부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이기 때문이다. 부를 추구하는 건 현인이나 보통 사람이나 똑같다. 하지만 그 의미는 같지 않다. 보통 사람에게 부를 추구한다는 건 돈이 인생의 목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인에게는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산책하는 것과 비슷하다. 만약 아침에 산책을 못 했다면 낮에 다른 운동을 하면 된다. 굳이 산책에 목맬 필요가 없다. 부의 주인이라는 건 그런 의미다.
부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 그래서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자가 돈을 갖지 못하게 금지하는 일을 멈추라. 철학자도 큰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이라면 원하는 만큼 쌓아 올리라.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정직하다.” “현인은 행운의 호의를 물리치지 않을 것이며 정직하게 모은 재산을 자랑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현인은 큰 재산을 문전박대하지 않는다. ‘올 테면 오라지’ 하고 손님으로 맞는다.”(‘행복론’ 23장)
세네카의 돈에 관한 철학이 현실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 아닌가 싶다. 돈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돈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돈이 있으면 삶이 편리해지는 건 사실이고, 그런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없어도 상관없지만 있으면 더 편해지는 것.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돈을 벌고 모으고 또 사용하는 게 가장 맞지 않나 싶다.
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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