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역사 건축구조기술사 “구조독립으로 안전한 대한민국 만들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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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기업을 향해] (사)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K-구조기술 세계 선도하지만 국내 현실은 ‘하청’
제주서 500여 명 집결 ‘건축구조 기술대전’ 개최
“권한없는 책임 50년 넘었지만 기술로 극복” 선언
참가자들 “구조독립 만세” 외치며 분리발주 촉구

‘2025 건축구조 기술대전’에서 건축구조기술사 대표 33인이 “구조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제공
‘2025 건축구조 기술대전’에서 건축구조기술사 대표 33인이 “구조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제공


828m 높이로 하늘을 찌르는 세계 최고층 빌딩인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679m ‘메르데카 118’, 서울 잠실의 554.5m ‘롯데월드타워’. 이 거대한 건축물들의 완성 뒤에는 한국의 건축구조 기술이 있다. K-건축구조 기술이 세계 초고층 빌딩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성과 뒤에는 씁쓸한 현실이 숨어 있다. 세계 무대에서는 최첨단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여전히 ‘하청 구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이 높아질수록 건축물 안전사고는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라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만 해도 광주 신축 아파트 붕괴사고, 인천 검단 아파트 무량판 주차장 붕괴사고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런 참혹한 사고 현장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사명감을 갖고 뛰어드는 이들이 바로 건축구조기술사다.

그들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만으로 현장에 달려간다. 이제 이들이 마침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홉 명에서 시작된 반세기 여정

50주년 기념 도서 ‘건축구조기술사 50년’.
50주년 기념 도서 ‘건축구조기술사 50년’.
건축구조기술사의 역사는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기술사법 개정으로 ‘건축구조기술사 제도’가 신설되면서 단 9명의 건축구조기술사가 탄생했다. 구조설계가 비로소 독립된 전문 분야로 공인받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건축사 자격 안에서 미약한 존재로 여겨졌고 사회적 인식도 부족했다. 1960년대 경제개발과 함께 구조설계의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제도적 뒷받침은 미비했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는 삼풍백화점 참사일인 6월 29일을 ‘구조안전의 날’로 제정해 2009년부터 매해 추모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는 삼풍백화점 참사일인 6월 29일을 ‘구조안전의 날’로 제정해 2009년부터 매해 추모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전환점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였다. 500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면서 건축구조기술사들의 가슴에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다. 이 뼈아픈 경험이 오늘날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의 정신적 토대가 됐다. 2003년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후 2009년에는 삼풍백화점 참사일인 6월 29일을 ‘구조안전의 날’로 제정해 매년 추모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삼풍백화점 참사의 교훈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시작된 이들의 활동은 각종 재난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2016년 경주 지진, 2017년 포항 지진 당시에도 전국의 건축구조기술사들이 자발적으로 현장에 모여들어 피해 건축물 안전 점검과 보강 방안 마련에 나섰다. 현재 전국적으로 활동 중인 건축구조기술사는 1300여 명으로 이들은 구조설계부터 시공 감리, 노후 건축물 진단까지 건축물의 전 생애주기에 걸쳐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

제주서 개최된 역사적 기술대전 성황

“구조 독립 만세!” 지난 19일 제주 신화월드 컨벤션홀에 500여 명의 건축구조기술사가 일제히 외친 구호가 울려 퍼졌다. 건축구조기술사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열린 ‘2025 건축구조 기술대전’의 클라이맥스였다.

이날 행사장은 마치 독립운동 당시의 열기를 연상케 했다. 구조 안전 선포식에서 대표 선서자 33명이 단상에 올라 ‘구조 독립 만세’를 외치는 모습은 일제강점기 민족 대표 33인을 오마주한 것이었다. 참가자들의 눈빛에는 반세기 동안 쌓인 아픔을 털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행사는 ‘다 함께 가고 이끄는 건축구조기술사회’라는 슬로건 아래 ‘과거·현재·미래’ 세 파트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김종호 제10대 회장이 ‘50주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주제로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업계 내부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2014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사고 당시 담당 검사였던 민경철 변호사도 “건축구조에 문외한이었던 검사로서 당시 사고를 통해 구조기술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았다”며 생생한 증언을 들려줬다.

2부에서는 박홍근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가 스마트 구조 감리 솔루션을 소개하고 강두현 부회장이 ‘대한민국 건설안전 이대로 괜찮은가’를 주제로 현실 진단에 나섰다. 3부에서는 이재홍 세종대 건축공학과 교수가 인공지능을 활용한 미래 구조공학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이날 발간된 50주년 기념 도서에는 회원 1300여 명의 이름이 모두 수록돼 연대 의식을 다졌다.

이날 행사의 핵심 메시지는 건축구조기술대전 추진단장인 조성구 부회장이 전한 현실 진단이었다. 1년여 준비 기간 동안 임원진과 깊은 논의를 거쳐 직접 기획한 이번 행사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반세기 동안 지속된 구조적 문제였다.

“5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권한 없는 책임만을 떠안고 있습니다.” 조 부회장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법에만 의존하거나 시장 논리에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오직 기술로 당당히 서겠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독립선언입니다.”

그는 500인이 한자리에 모여 외친 만세삼창의 진정한 의미를 설파했다. “건설 안전의 주체가 되지 못해 사고가 반복되는 하청 구조의 현실을 성찰함과 동시에 단순한 업역 확장이 아닌 건설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분리 발주를 외친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부회장은 “분리 발주야말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계약 관계를 정립해 진정한 전문가로서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길”이라며 “구조설계부터 구조 감리, 안전 진단, 해체 안전까지 모든 분야에서 법적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과거 선배 기술사들의 헌신을 되돌아보고 기술 독립과 전문성 강화를 다짐하는 의미 있는 자리”라고 이번 대전의 의미를 부여했다.

인명 사고 뒤에야 나오는 땜질식 대책

창립 50주년 ‘2025 건축구조 기술대전’에서 김영민 회장이 개회사 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제공
창립 50주년 ‘2025 건축구조 기술대전’에서 김영민 회장이 개회사 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제공
이번 기술대전에서 김영민 회장은 특별연설 단상에 서자마자 우리나라 건축 안전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0명이 희생되고 나서야 시설물안전특별법이 개정됐습니다. 마우나오션리조트가 폭설에 주저앉아 10명의 꽃다운 학생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구조관리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절망이 섞여 있었다. “광주와 인천에서 아파트가 붕괴하는 참사가 반복되고 나서야 구조설계 도면은 건축구조기술사의 책임하에 작성돼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기준이 나왔지만 이마저도 기득권층에 의해 시행이 부진한 상황입니다.”

김 회장의 지적은 우리나라 건축 안전 정책의 고질적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항상 대형 사고가 터진 후에야 땜질식 대책이 나오고 정작 근본적인 해결책은 업계 기득권층의 벽에 막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건축구조기술사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하청 구조’다. 건축주가 건축사에게 설계를 맡기면 건축사가 다시 구조기술사에게 하청을 주는 구조다. 이 때문에 구조기술사는 건축주와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어 독립적인 전문가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구조 안전에 대한 막중한 책임은 지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없는 모순적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스마트 건설 기술과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첨단기술이 도입되면서 구조기술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지만 여전히 하청업체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분리 발주가 구조 독립의 출발점

“건축구조의 독립이 안전사고를 막습니다. 하청 관계에서는 더 이상 건축물의 안전과 국민 생명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김 회장의 구조 안전 선포문이 끝나자 500여 명의 참가자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건축구조기술사들이 한목소리로 요구하는 것은 ‘분리 발주’다. 현재처럼 건축사가 구조기술사에게 하청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건축주가 구조설계를 별도로 발주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분리 발주가 실현되면 구조기술사가 건축주와 직접 계약을 맺고 독립적으로 구조설계를 담당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순한 업역 확장이 아니라 구조 안전 확보를 위한 핵심 과제다. 독립적인 계약관계가 성립되면 구조기술사가 건축주에게 직접 구조 안전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적정한 설계비를 받으며 무엇보다 전문가로서 독립적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현재 일부 선진국에서는 이미 구조설계 분리 발주가 일반화돼 있다.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는 구조 엔지니어가 독립적인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건축주와 직접 계약을 맺는다. 우리나라도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제도적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건축구조기술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또 다른 핵심 과제는 건축법의 글로벌 스탠더드화다. 현행 건축법상 건축구조기술사의 역할과 책임이 명확하지 않아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구조설계 도면 작성과 구조 감리에서 건축구조기술사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그에 상응하는 권한도 부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는 이번 기술대전을 통해 지난 50년간의 성과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50년을 준비하는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구조 독립과 분리 발주를 통해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의미 있는 자리였다.

제주의 바람 속에서 울려 퍼진 “구조 독립 만세”의 함성이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국민의 안전을 위한 실질적인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기술만으로는 부족… 사회적 책임감과 자긍심도 갖춰야”
[인터뷰] 김영민 (사)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회장
“50년 전 선배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오늘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 50년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쌓아야 할 때입니다.”

김영민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회장이 지난 19일 제주에서 열린 건축구조 기술대전 폐회식에서 던진 메시지다. 1300여 회원 중 500여 명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함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김 회장은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이 ‘진정성’이었다고 밝혔다. “전문 대행사에 의존하지 않고 임원진이 직접 1년여간 준비했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진심을 담아 만든 행사이기에 회원들의 마음에 깊이 와닿았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특히 그는 행사 기획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스토리텔링에 공을 들였다고 설명했다.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종합적인 자리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회장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을 묻자 그는 주저 없이 “회원들이 자긍심을 갖게 될 때”라고 답했다. “구조기술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은 현실에서 회원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은 후배 구조기술사들에게 특별한 당부를 전했다. “기술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책임감과 전문가로서의 자긍심을 함께 갖춰야 합니다.” 그는 “AI와 스마트 기술이 발달해도 구조 안전에 대한 최종 판단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며 “기술자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회원들과의 소통을 위해 전국 각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지방 회원들의 의견도 적극 수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국 어디서든 구조기술사는 같은 사명을 갖고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그는 이번 기술대전은 단순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밝혔다. “5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다짐한 구조 독립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워 나가겠습니다. 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가 앞장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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