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현장, 미래를 열다] 불합리한 상대평가 제도로 중소기업 진입 막아
상위 2개 업체가 용역 전체 물량의 ‘70% 독식’
국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인 원자력발전소 정비 분야에서 심각한 독과점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구자근 국회의원(국민의힘)이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원자력발전소 계측제어설비 정비용역 계약 34건 중 23건을 상위 2개 업체가 수주해 전체 물량의 약 70%를 독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A 업체(중견기업)는 15건에 3597억 원, B 업체(대기업)는 8건에 2173억 원을 수주했다. 두 업체의 수주 금액만 총 5770억 원에 달한다. 전체 8개 등록업체 중 나머지 6개 중소기업은 고작 30%의 물량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실정이다.
특히 A 업체의 경우 15건 중 6건을 수의계약으로 따냈고 B 업체도 8건 중 6건을 수의계약으로 수주했다. 수의계약은 경쟁입찰 없이 특정 업체와 직접 계약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는 셈이다. 이는 시장경쟁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과다.
원자력발전소 계측제어 시스템은 원전의 두뇌 역할을 하는 핵심 설비로 안전을 위한 점검과 보수 작업이 필수적이다. 한수원은 까다로운 등록 기준을 통해 경영·기술·품질 분야 적격성을 인정받은 업체에만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처럼 극심한 독과점이 벌어지는 것은 제도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런 독과점 구조가 장기적으로 원전 안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경쟁이 없는 상황에서는 기술혁신 동력이 약해지고 비용 효율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과점의 근본 원인은 산업통상자원부 고시인 ‘엔지니어링 사업자 선정에 관한 기준’에 있다. 이 고시는 입찰 업체 평가 시 최근 5년간 수주 실적을 상대평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적 순위에 따라 2위부터 5%씩 누적 감점을 받고 6위부터는 최대 25%까지 감점당하는 구조다.
업계에서는 신규 진입 4개 업체도 지난 10년간 공동 수급 제도를 통해 기존 업체 못지않은 기술력을 갖춰 기술력이 상향평준화된 상황에서 이 감점이 당락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고 호소한다. 2011년 우수 업체에 더 많은 기회를 줘 안정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도입된 제도가 오늘날에는 오히려 기업 간 격차를 고착화시키는 ‘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상대평가 제도 도입 이후 시장 집중도는 해마다 심화되고 있다. 2015년 이전에는 중소기업들도 어느 정도 수주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최근 5년간은 상위 2개 업체의 독점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다.
앞서 일감을 차지한 기업들은 기술혁신할 필요 없이 기존 실적만으로도 계속 수주할 수 있다. 반면 뒤처진 기업들은 실적 부족으로 애초에 경쟁 가능성이 차단돼 컨소시엄 참여나 사업 포기를 택할 수밖에 없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1·2위 기업이 기술 인력까지 독점해 새로 사업에 참여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런 악순환은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의욕까지 꺾고 있다. 아무리 우수한 기술을 갖춰도 실적 점수에서 밀려 입찰에서 탈락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담합 가능성이다. 구 의원은 “상위 기업들이 작정하고 동시 입찰하면 중소기업들을 3위 이하로 밀어내 경쟁입찰이 의미가 없는 큰 감점을 받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 의원은 수주 실적 평가 방식을 절대평가로 전환하고 수주 상한제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절대평가는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감점 없이 평가받는 방식으로 실적보다는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으로 승부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수주 상한제는 그동안의 독점 상태로 인한 입찰 불공정을 바로잡는 효과가 있다. 업계에서는 이런 개선안에 대해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절대평가로 바뀌면 우리도 기술력으로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산업통상자원부도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다. 올해 5월 고시를 개정해 10억 원 미만 소·중형 사업과 비파괴검사 분야에는 절대평가를 도입했다. 하지만 10억 원 이상 대형 사업은 여전히 상대평가를 유지하고 있어 근본적 해결에는 한계가 있다. 원자력발전소 계측제어설비 정비용역은 모두 대형 사업이기 때문에 이 개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산업부는 “대형 사업은 기술력·품질·안전 확보가 최우선”이라며 상대평가 유지 입장을 밝혔지만 “외부 연구 용역을 통해 선진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업계 의견을 수렴해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전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두 번의 개정 과정에서 외부 연구기관이 업계 의견을 수렴해 절대평가가 합리적이라는 최종안을 제시했지만 산업부가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연구 용역을 다시 추진할 게 아니라 바로 절대평가로 개정해야 한다”며 “현재의 고시는 엔지니어링 사업의 다양한 업종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획일적 제도”라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고시를 강제 규정이 아닌 이전 고시의 예외사항 항목이 반영된 것처럼 가이드라인 성격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해외 원전 선진국들은 이미 기술력과 가격을 중심으로 한 절대평가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원자력 안전은 타협할 수 없는 가치지만 그것이 시장 독과점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건전한 경쟁을 통해 기술혁신을 촉진하고 비용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전 확보의 길이다. 정부는 하루빨리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해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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