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벽이 스크린… 건물 자체가 무대
전시 업계선 ‘강북의 코엑스’ 불려
서울라이트 등 디자인 실험 무대
2027년 ‘WDO 70주년’ 총회 열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서울라이트 DDP 2025 가을’을 찾은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미디어파사드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동대문)을 지나 시선을 올려보면 부드러운 은빛 곡면이 감싼 거대한 건축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후 햇살이 금속 외벽에 부딪치면 사방으로 넓게 반사되고 해 질 녘 노을이 깔리면 주황빛이 곡면을 따라 미끄러져 외벽과 하늘의 경계가 옅어진다. 밤이 내리면 외벽 전체가 대형 캔버스로 변모해 빛과 영상이 흐르고 곡면을 따라 다채로운 레이저가 겹겹이 펼쳐진다. 샤넬과 까르띠에 같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무대로 삼고 세계적인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전시를 열기 위해 찾는 곳, 바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다.
개관 11년을 맞은 DDP는 이제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의 문화·예술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미디어아트 축제와 글로벌 패션 브랜드 쇼케이스가 이어지며 패션·디자인·기술이 교차하는 플랫폼이 됐다. 차강희 서울디자인재단 대표는 “DDP는 서울의 창의성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며 “세계적 행사와 시민 참여가 결합된 혁신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 건물 자체가 무대인 ‘강북의 코엑스’
전시·컨벤션 업계에서 DDP는 흔히 ‘강북의 코엑스’로 불린다. 굵직한 국제 박람회와 전시가 연이어 열리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두 공간의 성격은 다르다. 강남 코엑스가 대규모 박람회와 회의를 위한 전형적인 비즈니스 전시 중심지라면, DDP는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무대다. 단순히 행사를 위한 공간만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까지 담아내는 플랫폼이다. DDP는 미디어 파사드가 열리면 외벽 전체가 거대한 스크린이 되고 패션위크 때는 곡면 통로와 야외 광장이 런웨이로 변한다. 배경을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건물이 행사 서사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DDP는 기술과 예술이 결합한 현대 예술과 디자인을 빠르게 실험하는 창구 역할도 한다. 대표 격이 ‘서울라이트 DDP’다. 222m 길이의 비정형 외벽을 초대형 미디어아트 캔버스로 활용해 건축물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다. 올해 여름과 가을 두 차례 열린 서울라이트는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모았다. 특히 기네스 월드 레코드에 ‘세계 최대 비정형 건축물 3D 매핑 디스플레이’로 등재됐다.
참여 작가도 다양하다. 프랑스 작가 로랑 그라소는 태양풍을 시각화한 ‘솔라 윈드’를 선보였다. 미디어아트 그룹 디스트릭트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탐구하는 영상을 제작했다. 대만 아카 창은 레이저와 안개를 활용한 설치 작품을, 오픈(Open)AI 협업 아티스트들은 생성형 AI ‘소라’를 이용한 미디어아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김경훈 에이치에스플랜 건축사무소 대표는 “DDP는 건축물 그 자체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예술과 공공성을 함께 담아내는 공간”이라고 평가했다.
● 글로벌 디자인·패션·뷰티 허브로 확장
DDP는 최근 몇 년 새 글로벌 디자인·패션 산업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이달 열린 ‘디자인 마이애미 인 시추’는 그 변화를 잘 보여준다. 파리·뉴욕·마이애미를 거쳐 세계 디자인 트렌드를 이끌어온 이 전시가 처음으로 아시아 개최지로 서울 DDP를 택했다. 런던·파리·로스앤젤레스·뉴욕 등 16개 갤러리와 한국 디자이너 71팀이 참여해 전통 공예부터 현대 디자인까지 170여 점을 선보였다. 다녀간 관람객만 25만 명이다. 제시 리 디자인 마이애미 회장은 “서울의 창의성과 DDP의 공간 매력이 결합해 아시아 디자인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며 “내년에도 서울에서 전시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2027년에는 ‘세계디자인기구(WDO)’ 창립 70주년 총회가 DDP에서 열린다. WDO 총회는 전 세계 디자이너, 기업, 학계가 모여 디자인 산업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다. 개최 도시에 선정됐다는 건 그만큼 세계 디자인 중심지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토머스 가비 WDO 회장은 “서울은 세계적 디자인 중심 도시로 평가받고 있고 그 중심에 DDP가 있다”고 강조했다. DDP를 대표하는 서울패션위크와 서울뷰티위크도 해마다 관심도가 높아진다. 올해 8월 28∼30일 열린 서울 뷰티위크에는 시민과 관광객, 국내외 바이어, 뷰티업계 관계자 등 4만1000여 명이 방문했다. 이달 1∼7일 열린 ‘2026 SS 서울패션위크’는 7만4000여 명이 관람했다.
DDP의 또 다른 강점은 개방성이다. 건축적으로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언제든 시민이 드나들고 머물 수 있다. 이런 개방성을 바탕으로 DDP는 관람 위주 행사에서 참여형 프로그램의 장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달 14일 열린 시니어 패션쇼 ‘펫션 is 패션’에서는 50여 명의 시니어 모델이 런웨이에 올랐다. 같은 날 열린 반려견 패션쇼 ‘댕댕런웨이’에서는 100팀의 반려동물 가족이 제로 웨이스트 의상을 입고 무대를 걸었다. 행사장에는 메이크업 체험, 패션 컨설팅, 반려견 플리마켓이 함께 열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축제로 확장됐다.
차 대표는 “DDP는 빛·패션·예술·기술이 만나는 열린 플랫폼”이라며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 만드는 프로그램을 더 늘려 365일 살아 있는 문화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11년간 전시회 1000건 넘어… 준비 기간 포함하면 ‘연중 풀가동’
서울 랜드마크 된 DDP 2년 연속 시설 가동률 80% 킨텍스-부산 벡스코보다 ↑ 올 방문객 2000만 명 넘을듯
샤넬·디올·까르띠에·펜디·구찌·롤스로이스·벤츠·포르셰 등등….
지난 11년 동안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회와 신제품 론칭쇼를 개최한 주요 글로벌 기업과 브랜드들이다. DDP는 2014년 이후 지금까지 1000건이 넘는 전시와 행사를 치러내며 서울 강북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28일 서울디자인재단에 따르면 2024년과 올해 DDP의 시설 가동률은 80% 수준이다. 작년 고양 킨텍스(60%), 부산 벡스코(64%) 등 비슷한 성격의 복합문화공간보다 높다. 행사 사이의 준비 기간을 고려하면 일 년 내내 ‘풀가동’ 중인 셈이다. 특히 디자인박물관은 2028년 3월까지 예약이 완료됐다.
2015년 샤넬 크루즈 컬렉션 쇼를 시작으로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 회고전, 장 폴 고티에 전시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예술가들이 DDP로 모여들었다. 2023년 10월 이곳에서 세계경영진회의를 연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DDP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회의를 열겠다”며 정부 차원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DDP를 찾는 방문객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올해 연간 방문객은 역대 처음으로 20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8월에는 누적 방문 인원 1억 명을 돌파했다. 주요 이벤트와 행사가 이어지며 연말까지 많은 관광객들이 몰릴 것으로 보인다.
다음 달에는 디자인 축제인 ‘2025 서울디자인위크’가 열린다. 지난해 시범 운영했던 ‘DDP 루프톱 투어’는 올해 11월 정식 운영을 앞두고 있다. 서울디자인재단 관계자는 “DDP는 디자인 중심의 전시와 행사를 할 수 있는 서울의 유일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전 세계가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며 “K디자인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가면서 DDP의 가치도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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