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제4차 배출권거래제(2026∼2030년) 시행을 앞두고 철강과 석유화학 등 국내 제조업계가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기업들에 허용되던 탄소 배출총량이 대규모로 축소되면서 당장 기업들로서는 모자란 탄소배출권을 한국거래소 배출권거래시장 등을 통해 비싼 값에 사들여야 할 가능성이 생겼다. 게다가 전기료 인상도 겹치면 연간 수천억 원의 추가 부담이 예상된다. 가뜩이나 미국의 고관세 조치, 중국의 저가 공세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산업계 현장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아우성이 이어지고 있다.
29일 산업계에 따르면 환경부는 조만간 공개할 제4차 배출권거래제 시행 계획에서 기업들에 부여하는 배출권 할당량을 대폭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고민 중인 방안에는 총 배출허용량을 이전 연평균 6억970만 t보다 1억 t 이상 줄이는 안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연간 일정 분량을 시장안정화 등을 위한 ‘예비분’으로 별도 분리할 경우 실제 기업 할당량은 더 줄어들 수 있다.
당장 기업들이 모자란 배출권을 사들이기 위해 나서면, 이런 구매 수요 증가로 배출권 가격도 현재 t당 평균 9000원에서 3배 이상 뛸 전망이다. 환경부는 지난 9월 8일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에서 “2030년에는 4만 원 내지는 6만1000원까지 올라갈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 기업들로서는 생산비용이 불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발전사들은 탄소배출권을 무상으로 상당 부분 받아 왔는데, 앞으로 정부는 발전부문 유상할당도 10%에서 50%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발전사도 탄소배출권을 돈으로 사서 전기를 만들라는 것. 이 또한 발전 원가 상승으로 전기요금 인상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신동현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에게 의뢰한 ‘배출권거래제의 전기요금 인상 효과’ 보고서를 통해 “유상할당 비중 50% 확대와 배출권 가격 3만 원 가정 시 전기요금이 kWh당 9.41원 오른다”고 내다봤다. 업종별로는 전자통신 5492억 원, 화학 4160억 원, 철강(1차금속) 3094억 원의 추가 비용(연간) 증가가 예상된다.
철강업계와 화학업계 등 국내 제조업계는 지금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방식대로 배출권 거래 방향이 결정되면 당장 생존이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철강업계만 해도 추가 배출권 구매 비용이 연간 최소 6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료 인상 부담까지 합하면 연간 9000억 원이 넘는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중국산 저가 제품에 밀려나고 있는데 원가 상승을 부추기는 탄소배출권 제도로 ‘이중고’를 겪게 생겼다”라며 “정부는 친환경을 강조하면서도 ‘전기로’ 전환을 추진하는 철강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탄소배출을 줄이려면 고로를 전기로로 바꿔야 하는데, 정작 전기료가 오르면 전환 유인이 사라진다는 지적이다.
구조조정 절차를 밟고 있는 화학업계의 한숨도 짙어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주요 화학기업들 대부분이 1년 이상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비용 부담을 떠안게 됐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산업용 전기요금이 최근 3년 동안 70% 가까이 오르며 적자폭이 더 커지고 있다”며 “석유화학 공장은 전기로 돌리는 공장인데 어렵사리 이익을 내도 전기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신 연구위원은 “산업계가 적응할 수 있는 속도 조정이 필요하다”며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영준 대한상의 지속가능경영원장은 “배출권거래제 4차 계획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려면 기업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 설계가 필수적”이라며 “탄소중립 목표 달성과 산업 경쟁력 유지를 동시에 고려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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