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 없어” 불꺼진 제조업, 산업전기 사용 2년째 후퇴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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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세워 전기료라도 아껴야”
작년 산업용 전기판매 1.5% 줄어
코로나때 말곤 사상 첫 2년 감소
“경제활력 시들어 올해는 더 심각”

주인 없는 작업용 장갑
20일 경기 남양주시의 한 승강기 부품 제조업체의 용접기가 멈춰 서 있다. 공장 관계자는 “경기 부진으로 생산량이 급감했다”며 “다음 달부터는 생산 예정 물량이 없어 공장 전체 가동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남양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주인 없는 작업용 장갑 20일 경기 남양주시의 한 승강기 부품 제조업체의 용접기가 멈춰 서 있다. 공장 관계자는 “경기 부진으로 생산량이 급감했다”며 “다음 달부터는 생산 예정 물량이 없어 공장 전체 가동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남양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다음 달부터는 아예 일감이 ‘제로(0)’인 상황이라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해요.”

승강기를 만드는 국내 대기업에 철강 부품을 납품하는 A사 관계자는 20일 한숨을 쉬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우리 공장 안에 있는 설비는 운영을 멈추면 재가동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만큼 돈도 많이 든다”며 “일감이 줄어도 24시간 내내 돌리는 게 나은데 건설 경기 침체가 너무 길어지면서 이젠 공장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고 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부품 납품 계약을 맺은 대기업이 한 달에 새로 설치하는 승강기가 1500대였는데 이달에는 300대 수준에 그쳤다.

A사처럼 멈춰 서는 공장들이 늘면서 산업용 전력 판매량이 2년 연속 뒷걸음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한국전력의 전력통계월보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28만6212 GWh(기가와트시)로 전년보다 1.5% 줄었다. 2023년(―1.9%)에 이어 2년 연속 감소세다. 연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이 잇달아 마이너스(―)를 보인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한국 경제를 덮쳤던 2019∼2020년을 제외하면 사상 처음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증가했다.

올 들어서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계속 줄고 있다. 올해 1분기(1∼3월)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6만9994 GWh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3.6% 줄었다.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지면 올해도 연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이 전년보다 줄며 역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감소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전력 고위 관계자는 “공장 가동을 멈추거나 일부 설비 운영을 중단한 제조업체가 늘면서 산업용 전력 판매가 감소한 것”이라며 “외부적인 충격이 특별히 없는 상황에서 산업용 전력 판매가 줄어드는 것은 지금껏 찾아보기 어려웠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전력 판매량은 경기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 중 하나로 꼽힌다. 최근 국내 생산 부진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산업 활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진 상태”라며 “새로운 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중장기적인 발전을 모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내수부진 장기화에 멈춘 공장 늘어… “올해는 더 깊은 낭떠러지”


[불꺼진 한국 제조업]
산업전기 판매 2년째 후퇴
금융위기때도 줄지 않던 전력수요… 올 1분기 제조업 전력판매 3.9% ↓
車, 기계장비 등 생산감소 두드러져… 산업 전기료 줄인상도 기업 부담
“경기회복 최우선… 中企지원 고민을”

경기 북부의 한 산업단지에 자리한 중소기업 B사. 국내에선 손꼽히는 규모의 건설 부품 제조업체인 B사는 올 들어 전력 사용량이 급격히 줄고 있다. 지난해 1∼4월에는 월평균 8만 kWh(킬로와트시)가 넘는 전력을 사용했는데, 올해는 지난달까지 월평균 사용량이 6만3500kWh에 그쳤다. 이달 중순까진 약 2만 kWh만 쓴 상태라 한 달 사용량은 4만 kWh 안팎으로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B사 대표는 “건설 경기가 살아나서 신축 아파트가 좀 공급돼야 우리도 숨통이 트일 텐데 벌써 2년 넘게 매출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며 “지난해가 최악일 줄 알았는데 올해 더 깊은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용 전력 판매량이 2년 연속 감소한 건 내수 부진 장기화 등으로 공장 운영을 포기하는 이들이 급증한 탓이다. 산업용 전기요금 자체도 올라 기계를 재가동하는 데 드는 추가 비용 등을 감수하고서라도 공장 가동을 멈춘 업체가 그만큼 많은 것이다.

● 금융위기 때도 없던 산업용 전력 판매 감소

20일 한국전력의 전력통계월보에 따르면 1999년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이 전년보다 줄어든 해는 2019∼2020년과 2023∼2024년뿐이다. 2019년(―1.3%)은 반도체 슈퍼 호황기였던 2018년의 기저효과로 산업용 전력 판매량이 줄었고, 2020년(―3.7%)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이 컸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8년과 그 여파가 이어졌던 2009년에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전년보다 각각 4.4%, 1.8% 증가했다.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경기 상황을 진단할 수 있는 대표적인 간접 지표로 여겨진다. 경기가 좋을수록 기업의 생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전력 사용량도 늘어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산업 구조상 철강, 석유화학 등 전력 사용량이 많은 제조업 비중이 높아 전력 사용량과 경기 흐름 간의 연관성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산업용 전기요금이 잇따라 인상돼 기업들의 부담이 커진 점도 전력 판매량이 줄어든 이유 중 하나다.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주택용 전기요금은 두 차례 인상되는 데 그쳤지만 산업용 전기요금은 네 차례나 올랐다. 지난해 10월에도 정부는 산업용 전기요금만 인상에 나섰다. 대기업에 대한 산업용(을) 전기요금은 1kWh당 165.8원에서 182.7원으로 16.9원(10.2%) 올렸고, 중소기업에 대한 산업용(갑) 요금은 164.8원에서 173.3원으로 8.5원(5.2%) 인상했다.

● 서비스업 전력 판매는 늘었는데 제조업은 감소

제조업 전력 판매량 자체도 2년 연속 마이너스(―)를 보이고 있다. 산업용 전력 판매량의 90%가 제조업에서 쓰는 전력이기 때문이다. 2023년 2.1% 줄었던 제조업 전력 판매량은 지난해에도 1.8% 감소했다. 올 1분기(1∼3월)에도 제조업 전력 판매량은 6275만 MWh(메가와트시)로 전년보다 3.9%나 감소했다. 서비스업 및 기타 분야로의 전력 판매량이 지난해 1억6105만 MWh로 2.1% 증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자동차, 기계장비, 1차 금속, 전기·전자, 석유화학, 운송장비 등에서 생산 감소와 가동률 하락이 두드러지면서 전국 주요 산업단지에서 폐업 및 휴업이 늘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2023년 제조업 폐업자 수는 4만2267명으로 전년보다 14%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현재의 제조업체 위기가 이어지면서 산업용 전력 판매량 감소가 고착화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제조업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기가 회복되는 게 최우선인데 내수 부진과 수출 타격이라는 겹악재를 겪는 한국 경제의 현 상황에선 단기간에 쉽게 이루기 어려운 목표”라며 “중장기적으로 경제 활력을 되살리기 위한 정책과 중소 기술기업을 성장시킬 방안을 찾으면서 단기적으로는 운영 자체에 부담이 커지고 있는 중소 제조업체에 대한 지원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산업용 전력#전력 판매량#제조업 위기#경기 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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