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한 식품 제조 중소기업은 임원들이 직원들을 직접 자신의 차에 태워 출퇴근시키고 있다. 직원 출퇴근을 위한 전세버스가 불발된 탓이다.
이 지역은 버스가 하루 8대뿐이다. 이 때문에 회사는 전세버스를 계약해 직원들을 출퇴근시키려 했다. 문제는 600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었다. 고민 끝에 비슷한 애로사항을 가진 인근 기업과 비용을 분담해 공동 이용을 추진했다. 하지만 여러 기업이 공동으로 전세버스를 계약하는 것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령 위반이었다. 회사는 소관 부처에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버스업계의 수익 보호와 사고 시 책임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장기 검토’ 결론을 내렸다. 장기 검토는 이 문제를 앞으로 계속 검토해 보겠다는 얘기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불수용’보다 더 답답한 결론이다. 결론이 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규제 완화 요청 이후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다.
중소기업이 규제 개선을 요구해도 정부 부처가 장기 검토로 처리하며 결정을 미루는 사례가 매년 반복되고 있다. 검토 결과를 회신할 의무가 없어 요청은 방치되고, 제도 개선은 지연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8일 기업들의 규제 개혁 건의를 수집하는 ‘중소기업 옴부즈만’에 따르면 지난해 장기 검토로 처리된 규제 개혁 건의는 1444건으로 2020년(419건)보다 245% 증가했다. 전체 건의 중 장기 검토가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7%에서 28%로 4배 수준으로 뛰었다.
전남 완도에 있는 또 다른 중소기업은 택배 요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완도군은 2017년 장보고 대교가 개통돼 주요 섬 5개 모두 육지와 연결되면서 교통 여건이 좋아졌다. 하지만 택배사는 여전히 인근 육지 지역보다 1.5배 비싼 도서산간 요금을 받고 있다. 법에 운임 기준이 없어 택배사가 임의로 요금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기업은 “육지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물류 취약 지역이 아니다”라며 정부에 개선을 요청했지만 부처는 법률 개정 사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기 검토 처분을 내렸다.
국내 파력(波力) 발전 기업들도 제도 미비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부는 한수원, 지역난방공사 등 발전 사업자들에 신재생에너지 의무 비율을 부과하고 이를 민간사업자들과의 ‘공급인증서(REC)’ 거래로 충당할 수 있게 했지만, 파력은 대상에서 빠져 혜택을 받지 못한다. 파력 발전 기업들은 정부가 이미 파력을 유망 에너지원으로 지정한 만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담당 부처는 파력 기술이 초기 단계라며 지원을 미루고 있다.
기업들의 규제 개선 요청을 장기 검토로 돌리는 관행은 대표적인 소극 행정 사례로 꼽힌다. 사실상 회피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규제 완화 과정에서 기득권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보니 부처 입장에서는 손대기 꺼리는 사안”이라며 “부처가 답변을 회신할 의무도 없어서 장기 검토로 미루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현행법상 소관 부처가 장기 검토로 처리한 건에 대해 경과나 처리 현황을 따로 안내할 의무가 없는 것도 장기 검토가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다. 중소기업기본법에 따르면 정부 부처는 건의 접수일로부터 30일 이내에 회신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장기 검토로 회신한 뒤에는 이후 진행 상황을 공유하거나 추가 설명을 할 법적 의무가 없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답보 상태에 있는 규제개혁 과제들이 많은데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일이 어렵고, 예산 제약 문제 등으로 소극 행정에 가로막히기 쉽다”며 “정부와 지자체는 국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규제 개혁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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