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간 ‘외교선물’의 세계… 정상 간 선물, 친선-전략 의미 담겨
英, 美에 우정 기념 ‘결단의 책상’… ‘판다 외교’는 美中 대립 완화 상징
주요국, 고가일 땐 국가 신고 의무화… 사적 소유 막아 공직자 비리 예방
트럼프가 받은 항공기 ‘역대 최고’
보수진영도 “美 이미지 실추” 비판… 일각선 “외교선물 인플레” 우려도
《국가 정상 간 ‘외교 선물’의 세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카타르로부터 보잉 747-8 항공기를 선물로 받았다.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로부터 받은 선물 중 역대 최고가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외교 선물’의 세계를 살펴봤다.》
“비싼 항공기를 공짜로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12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동의 대표적인 부자 나라 중 하나인 카타르의 왕실로부터 대당 4억 달러(약 5600억 원)에 달하는 보잉 747-8 항공기를 선물로 받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뇌물에 해당한다”며 미국 내에서 다양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결국 미 국방부는 카타르로부터 해당 항공기를 인수해 대통령 전용기(에어포스원)로 개조한다고 21일 공식 발표했다.
카타르는 ‘2022년 월드컵’을 유치하면서도 적극적인 금권 로비를 펼쳤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런 카타르로부터 고가의 항공기를 받기로 한 데 대해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는 “트럼프의 최신 사기”라고 직격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바티아 운가르사르곤은 “카타르에서 온 뇌물”이라고 지적했고, 우파 인플루언서 로라 루머 역시 “트럼프 행정부에 큰 오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 정상이나 고위 당국자들이 주고받는 ‘외교 선물(diplomatic gift)’은 단순한 친선을 넘어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어 가볍게 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받은 항공기 선물이 왜 논란이 되는지, 과거 미국 대통령들은 어떤 선물들을 받았는지 알아봤다.
● 트럼프 항공기 선물, 20년 치 선물 총액 100배↑
카타르가 이번에 제공하는 항공기는 미 대통령이 역대 받았던 선물 중 가장 비싸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2001∼2023년 미 대통령이 받은 선물 총액이 약 380만 달러(약 53억2000만 원)인데, 트럼프 대통령이 받기로 한 항공기는 이 금액의 100배가 넘는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카타르가 먼저 항공기를 선물로 제안했다며 “선의의 제스처”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비판 여론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20일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 카타르 총리 겸 외교장관은 “동맹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상적인 일”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타르가 항공기를 제공하기로 한 건 트럼프 행정부가 먼저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CNN방송의 보도가 19일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 지시로 기존의 노후한 전용기를 신속히 교체하는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보잉사로부터 카타르가 포함된 기 발주 고객 명단을 확보했다는 것. 이에 따라 미 국방부가 먼저 비행기 구매 의사를 카타르 정부에 타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국 간 논의 과정에서 보잉기 제공은 매매가 아닌 선물로 둔갑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스티브 윗코프 백악관 중동특사가 카타르 항공기 입수 작업을 물밑에서 벌여 왔다며 “당초 ‘구매’였던 계획이 ‘공짜 선물’로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퇴임하면 카타르 제공 항공기 소유권을 트럼프 도서관으로 넘겨 사실상 자신이 사용할 뜻을 밝힌 바 있다.
● ‘결단의 책상’ 美英 특수 관계 상징으로
그동안 세계 최강대국 미국 대통령에게 주어진 선물은 종이책 한 권 같은 소소한 물건부터 살아 있는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중 트럼프 대통령이 올 초 취임 후 백악관 집무실(오벌 오피스)에서 파격적인 행정명령 쇼를 선보일 당시 줄곧 등장한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이 눈길을 끈다. 가로 1.8m, 세로 1.2m에 미국의 상징 등 갖가지 장식이 새겨진 이 화려한 책상은 1880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러더퍼드 헤이스 당시 미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 책상은 영국의 북극 탐사선 ‘HMS 레졸루트호’의 해체된 선체로 만들어진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 선박이 1855년 북극해의 빙하에 갇혔는데, 근처를 지나던 미국 포경선이 이를 발견해 수리를 도왔다. 이에 빅토리아 여왕이 양국의 우정을 기념하며 레졸루트호 해체 때 나온 목재로 책상을 만들어 미국에 선물했다. 결국 해당 선박의 이름을 따 ‘결단(Resolute)’의 책상으로 명명하게 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에 대한 대응을 결정한 역사적 순간도 이 책상에서 이뤄졌다.
미중 데탕트의 상징으로, 중국 ‘판다 외교’의 시발점이 된 자이언트판다 한 쌍도 빼놓을 수 없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중국을 전격 방문했을 때 영부인이 판다 그림을 보고 “귀엽다”고 감탄하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임대를 약속한 것. 이로부터 두 달 뒤 중국에서 워싱턴 국립동물원으로 넘어온 ‘싱싱’과 ‘링링’ 판다를 보기 위해 첫해에만 110만 명의 방문객이 몰려들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1984년 스리랑카로부터 18개월 된 코끼리를 선물로 받았다. 당시 스리랑카의 집권당이던 통일국민당과 레이건 대통령이 소속된 공화당 모두 상징 동물이 코끼리라는 데 착안한 선물이었다.
때론 한 장의 보험증서가 대통령 선물로 주어지기도 했다. 2011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호주 노던준주 다윈을 방문했을 때 ‘악어 보험 가입증서’를 선물로 받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악어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부인 미셸 여사에게 3만 파운드(약 5000만 원)를 지급한다는 내용의 다소 유머러스한 선물이었다. 노던준주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치명적인 악어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지급된 보험증서는 이곳의 ‘악어 보호’와 ‘악어 관광’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미국 고위 공직자가 받은 외교 선물 중 고가의 사치품이 문제가 된 계기로는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으로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사례가 꼽힌다. 그는 1785년 주프랑스 공사 임무를 마친 뒤 귀국하면서 프랑스 루이 16세로부터 ‘이별 선물’로 408개의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장식된 ‘담배 상자’를 받았다. 프랭클린은 “외국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빌미를 제공할 것”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선물을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딸 세라 등 가족들이 다이아몬드를 빼내 하나씩 팔면서 현재는 다이아몬드가 한 개만 박혀 있는 상태다. 이 사건은 미국 헌법 조문에 “연방 공무원은 직무에 대한 보상 외에 임기 중 어떠한 이득도 취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 카타르-아제르바이잔 등 산유국 사치품 외교 공세
20세기 들어선 석유와 천연가스 판매로 막대한 부를 쌓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들이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고가의 선물 외교 공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 중에서도 카타르는 선물 외교에 특히 적극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중동의 맹주이며 종파 갈등과 지역 패권 경쟁 중인 사우디와 이란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카타르는 안보를 위해 외교력 확대에 공을 들여 왔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고가의 선물을 동원하는 외교와 로비에도 적극적이었다. ‘항공기 로비’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7년 사우디, UAE, 바레인, 이집트 등 주변 4개국이 카타르의 친이란 및 친튀르키예 정책 등을 문제 삼으며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단절하는 ‘카타르 단교 사태’가 터졌을 때, 군사외교적으론 물론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준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감사의 표시로 보잉 747을 선물한 것.
2022년 말 유럽의회를 들썩이게 한 ‘카타르 게이트’도 카타르의 사치품 로비가 빚은 사건이다. 에바 카일리 당시 유럽의회 부의장이 월드컵 개최국인 카타르로부터 약 15만 유로(약 2억 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지난해에는 밥 메넨데스 전 미 상원의원이 카타르로부터 금괴, 현금, 고급시계 등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신흥 산유국인 아제르바이잔도 인권 침해 조사를 무마시키기 위해 2001∼2010년 유럽 평의회 의원들에게 캐비아(철갑상어 알), 보석, 카펫 등을 선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의원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음식’으로 손꼽히는 블랙 캐비아를 최소 500g(시가 약 100만 원 상당)씩, 1년에 네 차례 선물해 ‘캐비아 외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 주요국들 ‘외교 선물’ 국고 귀속 법제화
미국 등 주요국들은 공직자 비리를 막기 위해 ‘외교 선물’의 사적 소유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미국은 1966년 외국 정부로부터 감정가 480달러가 넘는 선물을 받을 경우 정부에 반납하고, 연방관보에 이를 매년 공시토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선물받은 물건을 직접 소유하려면 감정가를 내고 사야 한다.
이 법에 따라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와 두 딸은 2014년 사우디 왕실에서 받은 135만 달러(약 18억8000만 원) 상당의 장신구 세트를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으로 이관했다. 애견인으로 소문 났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불가리아에서 선물받은 개를 감정가 430달러를 내고 구입했다.
프랑스도 2016년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해 대통령, 장관 등 고위 공직자가 공직 수행 중 받은 외국 선물은 국가가 소유하도록 했다. 캐나다 역시 2006년부터 200달러를 초과하는 외교 선물은 신고 후 국가에 반납하도록 했다. 한국은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공무원이 외국으로부터 100달러 이상의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이를 신고하고 국고에 귀속하도록 하고 있다.
외교 선물을 사적으로 소유했다가 뒤늦게 들통난 사례도 있다. 1972년 닉슨 전 대통령의 딸들은 사우디 왕실로부터 받은 5만2400달러 상당의 보석을 국가에 신고하지 않고, 사적으로 착용한 사실이 알려져 비판받았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집권 1기 때 일본산 골프채, 사우디산 단검, 인도산 보석 등 117건 이상의 외국 선물을 신고하지 않은 게 의회 조사 결과 드러났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2023년에 해당 선물들을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반납했다.
이처럼 각국이 외교 선물에 대한 규제를 마련해 놓고 있는 상황에서 카타르의 이번 항공기 선물은 초강대국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미국의 입장이 비싼 선물로 좌지우지되거나 매수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가 전 세계에 ‘거래에 열려 있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외교정책이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입찰자에게 팔리는 ‘경매’와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것.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초고가 제트기가 외교 선물에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요트나 섬 등의 다른 고가 선물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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