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변덕에 뿔난 英-佛 “핵무기 협력”…유럽 핵우산 펼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10일 20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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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왼쪽)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9일 영국 런던의 총리 관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두 정상은 이날 최초로 양국의 핵무기 사용 협력에 전격 합의했다. 런던=AP뉴시스

유럽의 핵보유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사용 협력에 합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 전쟁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부각된 러시아의 위협이 가장 직접적 요인으로 분석된다. 유럽의 핵심 동맹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탈퇴와 역할 축소 등을 시사하며 ‘미국 없는 안보’ 위기를 고조시킨 점도 한몫했다. 트럼프식 예측 불가능한 외교가 노골화되며 ‘미국을 믿을 수 없으니 스스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정부는 9일(현지 시간)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핵 억제력 강화 협력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두 나라는 새로 서명된 선언문에서 각국의 억제력이 독립적이지만 조율할 수 있으며, 두 나라가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유럽에 대한 극단적 위협은 없다고 처음 명시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등 적대국의 공격 시 핵전력으로 공동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프랑스 엘리제궁(대통령실) 관계자도 이번 합의에 대해 “우리의 동맹과 적대세력 모두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밝혔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도했다.

또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합의로 양국은 핵 대응 조율을 논의하는 군사·정치기구도 마련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美없는 핵우산’ 대비 나선 英-佛 “유럽 안보에 책임 다할때”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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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두 나라가 유럽 대륙의 안보를 위해 특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기대가 있다. 이제 이를 명확히 할 때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영국 국빈 방문을 시작한 8일 영국 의회 연설에서 이같이 밝혔다. 다음 날 영국 정부는 양국이 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사용 협력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유럽의 양대 핵 보유국인 프랑스와 영국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핵전력을 공동으로 활용함으로써 유럽 동맹국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뒤 미국이 유럽 안보에서 발을 빼려 하고,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보이자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전역에 걸쳐 실질적인 핵우산을 제공해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을 줄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영-프, 차세대 장거리 미사일 개발할 듯

9일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따르면 양국은 프랑스 대통령실인 엘리제궁과 영국 내각이 공동 의장을 맡는 ‘핵 감독 그룹’을 설립할 예정이다. 이 기구는 핵 관련 정책, 운용, 협력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핵담당 관리로 일했던 윌리엄 알베르크는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양국이 핵무기 공동 개발까지 확대하진 않겠지만 탄두 설계 연구를 교류하고 자재를 공동 운용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양국이 작전구역을 서로 나누거나 부족한 전력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올해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한 핵탄두는 합쳐서 약 545기다. 러시아가 5459기, 미국이 5177기를 보유한 점을 고려하면 미미한 규모다. 하지만 핵탄두 1기만으로도 강력한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핵무기 사용 협력은 의미 있는 안보 효과를 지닌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의 핵심적인 핵 억지력은 잠수함 발사 미사일이다. 영국은 이 미사일을 미국에서 조달했지만 독립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최근에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공중 발사 옵션을 추가할 계획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엔 미국산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미국 F-35A 전투기 구매 계획도 포함됐다. 프랑스의 핵무기는 자체 개발된 잠수함 발사 및 공중 발사 미사일로 구성돼 있다.

양국은 핵전력 협력 외에도 2010년 합의된 광범위한 방위 협정을 개선한 ‘랭커스터 하우스 2.0 선언’에도 서명하기로 했다. 이 선언에는 양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스톰섀도 미사일과 스칼프 미사일을 대체할 차세대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또 양국의 합동 원정군을 확대한다는 계획도 포함된다.

● “말 없이 미국으로부터 ‘탈동조화”

유럽 안팎에선 영국과 프랑스의 이번 결정을 두고 파격적인 조치란 시각이 많다. 영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핵기획그룹(NPG) 회원국으로, 나토 안보를 위해 자국의 핵전력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나토 핵공유 협정에서 탈퇴해 핵전력 사용과 관련해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겠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핵전력 운용이나 협력을 놓고 입장 차이가 있던 두 나라가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의 유럽 관련 안보 전략 변화로 손을 잡았단 평가가 나온다.

엘루아즈 파예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 연구원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합의는 군사 및 정치적 차원에서 전례 없는 수준의 공조를 이룬 진정한 조치”라고 평했다. 필립스 오브라이언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유럽이) 말 없이 미국으로부터 탈동조화(decoupling)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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