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13일(이하 현지 시간)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소는 힌두교에서 신성한 동물이다. 인구 80%가 힌두교를 믿는 인도에서 특별대우를 받는다. 소가 지나가면 차들이 도로에 멈춰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병들고 버려진 소를 위한 전용 병원도 있다. 힌두교 신자들은 쇠고기도 먹지 않는다. 인도 케랄라주와 서벵골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는 소의 도살과 식용을 금지하는 보호법이 제정돼 있다. 소가 힌두교 3대 신 가운데 하나인 시바신이 타고 다닌 동물(난디)이기 때문이다.
소를 이처럼 숭배하는데도 인도는 세계 최대 낙농 국가다. 세계에서 우유를 가장 많이 생산한다. 힌두교 신자 중 상당수는 채식주의자인데, 유제품은 섭취한다. 이들에게 소의 젖은 무엇보다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런데 세계 우유의 22%를 생산하는 인도에선 풀 등 식물성 사료를 먹은 젖소에서만 우유를 짤 수 있다. ‘신의 감로(甘露)’로 불리는 우유가 종교의식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힌두 사원에서는 적어도 하루에 2번 우유로 신상을 목욕시키고,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기 전 우유에서 추출한 버터를 시신에 바르기도 한다.
미국, 인도에 관세 25% 매겨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인도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폭탄에도 버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7월 31일(이하 현지 시간) 69개 경제 주체(68개국+유럽연합)를 상대로 새롭게 적용된 상호관세율을 부과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8월 7일 각국에 대한 새로운 상호관세 부과 조치가 발효됐다. 인도의 경우 25% 상호관세가 부과됐다. 지난해 미국의 대(對)인도 무역적자는 457억 달러(약 63조5000억 원)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2일 인도에 26%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고, 이후 인도 정부 대표단은 최근까지 다섯 차례 워싱턴을 방문하는 등 미국과 협상했지만 관세율은 1%p만 낮아졌다. 양국이 농산물과 우유 등 유제품에 대한 관세 문제를 놓고 심각한 이견을 보이면서 합의 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모디 총리와 집권 여당 인도국민당(BJP)의 핵심 지지층인 농민들 목소리가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한 물품은 유제품이다. 미국은 인도에 유제품을 비롯한 농산물 시장의 완전 개방을 요구했으나 인도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게다가 인도는 미국산 수입 우유에 대해 엄격한 수의학적 증명서를 요구했다. 미국산 우유가 육류나 혈액 등 동물성 사료를 먹인 젖소에서 생산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인도는 힌두교 문화와 종교적 관습에 따른 것이라면서 이러한 조건은 “협상 불가의 레드라인”이라고 못 박았다.
인도는 경제적으로도 유제품을 개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인도 최대 국영 상업은행인 스테이트뱅크오브인디아는 유제품 시장이 미국에 개방될 경우 연간 1조300억 루피(약 16조3000억 원) 손실을 입을 수 있으며 인도 내 우유 가격이 최소 15% 하락하기 때문에 소규모 낙농가는 더는 유제품을 생산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모디 총리가 소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다. 인도에서 소는 신성시되는 동물이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 페이스북 “인도의 영혼은 농촌에 있다”
낙농을 비롯한 농업은 인도 국내총생산(GDP)의 16%를 차지하는 주요 산업이다. 특히 전체 인구의 70%가 직간접적으로 농업과 관련 있는 만큼 정치권은 ‘농심(農心)’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인도국민당은 2020년 9월 의회에서 농업개혁법을 통과시켰는데 농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모디 총리가 1년 2개월 만에 폐기를 선언한 바 있다. 농업개혁법은 농산물 거래, 가격 보장·농업 서비스, 필수식품 관리 등을 규정하고 국가가 관리하던 농산물 유통과 가격 책정을 시장에 개방하는 게 핵심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모디 총리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도 모디 총리는 유제품을 비롯한 밀·옥수수·쌀·유전자변형작물(LMO) 콩 등 농산물 시장을 지켜내야 차기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본다. 니르말라 시타라만 인도 재무장관은 “우리 농업과 농민의 입지를 약화하는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인도는 7월 24일 영국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에서도 자국산 농산물 95% 이상을 무관세 혜택 대상으로 지켜냈다. “인도의 영혼은 농촌에 있다”고 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인도 정치인에게 농업은 건드릴 수 없는 성지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 중단 문제로 정면충돌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에 러시아산 석유 수입 중단을 압박하고자 3주 후부터 인도산 제품에 25%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8월 6일 서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인도에 대한 관세율은 3주 후부터 50%로 치솟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휴전에 합의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는 물론 러시아 교역국들에도 2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해왔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8월 4일 자신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트루스소셜 계정에 올린 글에서 “인도는 러시아산 석유를 대량 구입할 뿐 아니라 상당 부분을 공개 시장에 되팔아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이에 대응해 인도에 대한 관세를 상당히 올릴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 최측근인 스티븐 밀러 백악관 정책 담당 부비서실장도 “트럼프 대통령이 분명하게 밝혔듯이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계속하도록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인도 청년 의회 회원들이 4월 5일 뉴델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관세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러시아 원유가 필요한 모디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조치에도 인도가 ‘버티기’를 하는 이유는 에너지가 경제발전과 물가 안정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도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국가다. 2024~2025 회계연도 기준 인도의 석유 수입 의존도는 88.2%에 달하며, 경제성장과 산업 발전 등으로 에너지 사용량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관련 비용이 크게 증가하자 인도는 러시아로부터 값싼 원유와 천연가스를 대거 수입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제재하고 나서자 러시아는 원유와 가스 가격을 대폭 할인해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자 중국과 인도가 이를 대량 구매했다. 러시아가 수출하는 원유의 80%를 두 나라가 수입하고 있다. 인도는 상반기 기준 하루 평균 180만 배럴의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했다. 인도 전체 원유 수입량의 38%가 러시아산이다. 인도로선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 수입을 중단할 경우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물가가 크게 올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모디 총리는 그동안 제조업 강화와 물가 안정을 가장 중요한 경제 목표로 내세웠다. 인도 외교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추가 관세 부과에 대해 “매우 불공정하고 부당하며 이성적이지 않은 조치”라면서 “우리는 14억 국민의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주장했다.
모디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부터)이 2024년 10월 23일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중국 대신 인도 향하는 미국 빅테크
인도의 또 다른 노림수는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인도를 중국 견제 역할을 할 핵심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선 군사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제조업 분야에서도 중국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인도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그동안 일본, 호주, 인도와 함께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협의체 ‘쿼드(Quad)’를 만들어 중국의 군사력 팽창을 저지해왔다. 쿼드는 트럼프 행정부 1기 때인 2020년 출범했다. 쿼드는 최근 중국에 맞서 ‘핵심 광물 이니셔티브’를 출범하는 등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인도는 미국 등 글로벌 기업들의 제조업 허브가 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 빅테크 기업 애플은 최근 몇 년간 인도에서 생산능력을 확대해왔다. 시장조사 전문업체 카날리스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미국이 수입한 애플 스마트폰의 인도 생산 비중은 44%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13%)보다 크게 늘어난 수치다. 반면 중국산 비중은 61%에서 25%로 줄었다. 애플뿐 아니라 다른 미국 빅테크 기업들도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인도로 속속 이전하고 있다. 미국 경제 전문 방송 CNBC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를 제조업 대안으로 육성하고 있어 인도를 홀대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인도는 브라질·러시아·중국 등으로 구성된 신흥경제국 협의체 브릭스(BRICS)에서도 리더십을 놓고 중국과 경쟁하고 있다. 브릭스는 서방 중심의 경제 질서를 견제하며 미국달러화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브릭스 회원국들을 상대로 달러화 패권에 도전하면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인도는 브릭스의 달러화 대체통화 구상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으로선 인도의 이런 입장이 전략적으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전 세계를 강타한 관세 폭풍 속에서 인도의 버티기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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