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 전략 쓰니 혁신 못 나와… 대체불가 기술 위해 집중 투자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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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학술원’ 과학기술 정책 포럼
세계적 韓 과학자 20여명 참석… R&D예산 삭감 정책 등 쓴소리
정부의 챗GPT-딥시크 추격 전략… 혁신 기술 독자 개발엔 도움 안돼
기초과학 단계부터 튼튼히 세워야

18일 최종현학술원이 서울 강남구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개최한 ‘과학기술의 시대, 흔들리지 않는 국가전략을 묻는다’ 과학기술 정책 포럼에서 염한웅 포스텍 교수(왼쪽부터), 이상엽 KAIST 연구부총장, 이정동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대학원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최종현학술원 제공
18일 최종현학술원이 서울 강남구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개최한 ‘과학기술의 시대, 흔들리지 않는 국가전략을 묻는다’ 과학기술 정책 포럼에서 염한웅 포스텍 교수(왼쪽부터), 이상엽 KAIST 연구부총장, 이정동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대학원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최종현학술원 제공
“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 배분을 ‘카르텔’로 규정하니까 R&D 시스템에 대한 불신만 커졌다.”

“아직도 선진국 따라잡기식 ‘추격자’ 전략을 쓰니 혁신이 나올 수가 없다.”

국내 과학계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석학들이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이 급변하는가 하면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정부 정책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선진국에 끌려다니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석학들은 국가 전체가 지향하는 과학기술 정책의 목표와 비전을 합의하고 한국만이 할 수 있는 혁신기술을 장기적으로 확보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종현학술원의 이공계 석학 네트워크인 과학기술혁신위원회(과기위) 위원들은 18일 서울 강남구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국가 과학기술 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포럼 ‘과학기술의 시대, 흔들리지 않는 국가전략을 묻는다’를 열었다. 최종현학술원은 SK그룹이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 20주기를 기념해 2018년 출범한 비영리 지식 플랫폼이다. 과기위는 국내외 50여 명의 이공계 석학으로 구성됐다.

이날 포럼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물리학회장에 선정된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 교수, 유력 노벨상 수상자로 거론되는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 단장(서울대 석좌교수),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인 염한웅 포스텍 교수, 이상엽 국가바이오위원회 부위원장(KAIST 연구부총장), 전 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인 이정동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 교수 등 20여 명의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현장과 화상을 통해 참가했다.

우선 과학자들은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 쓴소리를 냈다. 염 교수는 발표에서 “윤석열 정부에서 기존 R&D 확대 정책을 부정하고 R&D 예산 배분을 ‘카르텔’로 규정해 R&D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 취약성이 증폭됐다”고 비판했다. 현 교수는 “지난 2년간 국내 R&D 예산 대신 미국 중심의 국제 공동연구 예산이 많이 늘어났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R&D 예산을 대폭 줄이는 등 미국 과학계가 최근 굉장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무분별한 국제 공동연구를 지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한국만이 만들 수 있는 혁신 기술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염 교수는 중국 ‘딥시크’, 미국 ‘챗GPT’가 등장하자 한국이 갑작스럽게 인공지능(AI) 분야 R&D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는 데 대해 “이른바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국가가 중점 기술 몇 가지를 선정해 선진국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추격자’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에 혁신이 나올 수 없다”며 “새로운 혁신 기술이 나올 때마다 한국이 휘청거리며 R&D 방향을 잡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상엽 부위원장은 “예산, 인력 규모로는 중국, 미국 등을 앞서기 어렵기 때문에 대체 불가 기술·산업·제품·서비스(NFTIPS·Non-Fungible Technology, Industry, Products, Service)를 추구할 수 있는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적인 과학기술 정책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려면 기초과학에 토대를 둔 과학 생태계 육성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정동 교수는 “애플은 2013년 전기차 ‘애플카’를 만들겠다고 했다가 10년 후 포기했지만 샤오미는 전기차 개발을 선언한 지 3년 만에 만들어냈다”며 “R&D 생태계 안에 다양한 기초과학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권에 따라 흔들림 없는 과학기술 정책 기조를 만드는 데 과학자들의 기탄없는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중요한 과학정책 어젠다가 실제로 입안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하지만 IBS 단장, 교수 등 개별 연구자부터 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등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예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헌법 제127조 1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해 국민 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를 수정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경제 발전에 국한된 과학기술의 정의를 확대해 국가의 혁신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과학기술을 단지 경제 성장의 도구로 보지 않고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 지원과 보호가 헌법 수준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날 김유석 최종현학술원 대표이사는 “과학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성장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며 “과학기술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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