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기술은 전체 산업구도 바꾸는것… 곳곳에 잘 스며들게 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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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시대] 이재명 대통령에게 바란다 〈2〉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새 정부 정책, 창조적 파괴에 맞춰야… AI정책은 발전 아닌 활용에 중점
새 씨앗 뿌리는 마음으로 시작하길
中, 장기성장 정책 세우고 전폭 지원… 주변국 산업 흡수하는 블랙홀 변신
우리 정부도 정부 다운 역할 찾아야

《 이재명 정부는 성장 잠재력 저하, 혁신 기업의 부재 등 한국 경제의 고질병을 치유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인공지능(AI)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약속한 바 있다.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AI 기술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AI를 각 산업 분야에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선”이라며 “한국의 풍부한 산업 기반에 AI를 접목하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

이정동 서울대 교수.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보다 중요한 것은 AI를 각 산업에 잘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
“정책의 방점을 ‘AI의 발전’이 아니라 ‘AI의 활용’에 찍어야 한다”며 “한국의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에 AI를 접목하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에서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축적의 시간’과 ‘최초의 질문’ 등 저서를 통해 한국 산업 혁신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새 정부가 펴야 하는 산업 및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성은 무엇인가

“‘창조적 파괴’가 정책의 근간이 돼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도,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고 낡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산업이 ‘새살’로 바뀌는 역동적인 환경을 산업 생태계에 조성해야 한다.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은 인내의 시간이다. 내가 지금 씨를 뿌려서 후임자, 또 그 후임자 대에서 성과를 낸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장기 정책과 단기 정책을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 경제를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단기 정책이고, 성장 잠재력을 어떻게 키울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장기 정책이다. 예를 들면 통상 이슈에서 ‘당장 협상을 잘해서 관세를 얼마나 깎느냐’의 문제는 단기 이슈다.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해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장기 이슈다. 단기 이슈와 장기 이슈가 한 테이블에 올라가면 국정 최고책임자는 단기 이슈에 먼저 손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나기부터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 산업을 망친다. 꼬리가 머리를 흔들면 안 된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단임제 정부라면 눈앞의 일부터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리더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돌 하나 더 놓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동안 크고 작은 부양책을 20번 넘게 썼다. 그동안 일본의 산업 근간이 망가졌다. 비록 (대통령 임기가) 5년밖에 안 되더라도 50년 앞을 내다보고 돌을 놓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여파는 어떠한가.

“비유하자면 누군가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잘라라. 아킬레스건을 몇 가지 알려 줄테니 정확하게 수술해라’라고 지령을 내린 것처럼 정밀타격을 줬다. 예산삭감 이후 재계약이 안 된 ‘포닥(박사 후 연구원)’ 숫자가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 와서 예산을 복구해도 무용지물이다. 공장은 반년 정도 스위치를 껐다가 켜도 다시 바로 가동할 수 있지만 연구는 다르다. 완전 ‘생짜’로 다시 해야 된다.”

―중국의 산업,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파르다.

“중국은 장기 성장 정책을 세우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다. 전략 산업을 확실하게 지정하고 충분한 인센티브를 부여해 자원이 몰리도록 해준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이제 블랙홀처럼 주변국의 산업 생태계를 빨아들이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한국에서 이렇다할 혁신기업이 배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기업들 중엔 ‘스케일업(Scale up)’하는 기업이 전혀 없다. 작은 성과에서 시작해 비용을 투자하고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거쳐 성과를 점점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스케일업이다. 9999번 실패하더라도 1번 성공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실패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실패는 곧 책임소재와 비용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기업일수록 더 심하다. 같은 이유로 정부의 연구개발 사업의 성공률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도전성이 있는 연구가 아니라 성공이 보장된 연구만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이 퇴보하고 있다고 보나.

“주가는 미래 성장 잠재력의 합계다. 지금 돈을 못 벌더라도 도전적으로 시도를 하고 있을 때 주가가 올라간다. 근데 우리 기업들을 보면 장부 가격과 주가 차이가 크지 않다. 시장이 잠재력을 크게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IMF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점점 기업의 의사결정이 단기화되고 수익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기업가의 시대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한국 산업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됐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벤처캐피털(VC)과 금융회사들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나.

“최근 통계를 살펴보면 VC 투자는 초기 벤처가 아니라 거의 성공한, 또는 성장이 보장된 벤처에만 투자하고 있다. 그건 벤처가 아니다. 벤처 투자는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기업이라도 가능성을 보고 투자해 결실을 얻는 것이다.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가지고 돈을 빌리는 게 아니라 자기 아파트를 맡기고 돈을 빌려야 하는 현실이다. 은행의 존재 이유가 없다.”

―혁신기업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대체 불가능한 것을 찾아나서야 한다. 우리가 1번부터 20번까지 하고 있는데, 글로벌 기업들은 1번부터 100번까지 하고 있다 가정해 보자. 이 상황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잡으려면 101번, 102번이 뭔지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다들 21∼100번 중에서 찾고 있다.

101, 102번이 무엇일지는 우리도 모르고 글로벌 기업도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과학에 투자해 예상치 못한 발전의 씨앗들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 해도 그렇게 허접한 나라가 아니다. 특허 개수로는 세계 4, 5위권, 논문은 10위 권이다. 결정적으로 한국은 앞선 세대의 피와 땀으로 만든 넓은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포트폴리오가 넓다는 건 우리가 각기 다른 종류의 기술을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 새 기술이 생길 가능성도 많다는 의미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과학이라는 씨앗들을 심을 필요가 있다.”

―산업 혁신을 위해 정부나 정치권은 무엇을 해야 하나

“혁신과 관련해서는 정부보다 국회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절차에서 합의를 이루라고 만든 공간이 국회인데 막상 국회에서는 그런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신이 생기려면 창조적 파괴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규제완화 등을 통해 창조의 길을 터주는 것은 물론, 파괴되어 밀려나는 분야의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단기적으로는 밀려나는 사람들의 생활에 문제가 없도록 보살피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재교육을 통해 일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게 필요하다. 이 매커니즘 역시 국회가 앞장서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 해외 인재를 데려오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턱을 더 낮춰야 한다. 지금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인도 등 국가 출신 학생들만 해도 정말 똑똑하다. 근데 한국에서 취직을 못 한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글로벌 인재 허브를 자임할 정도로 생각을 바꿔서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이공계 학생들의 의대 집중 현상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이공계의 성공 사례를 더 많이 보여주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려면 새 대통령부터 더욱 과학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AI 기술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정부 정책은 무엇인가.

“AI의 속성은 과거 철도, 전기 등과 같다. 기술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기술이 각 산업에 침투해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꾼다는 게 핵심이다. AI 시대에 선진국이 되려면 AI 기술 자체를 고도화하는 것보다 AI가 각 산업 분야에 빨리 스며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정책의 방점을 ‘AI의 발전’이 아니라 ‘AI의 활용’에 찍어야 한다. ‘AI 기술을 최고로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책은 잘못됐다는 의미다. AI 기술이 극도로 고도화돼도 일선 산업 생태계가 AI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AI 전문가에게 바이오를 가르치는 게 빠르겠나, 아니면 바이오 전문가가 AI를 배우는 게 빠르겠나. AI 자체의 발전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구축해 놓은 넓은 산업의 포트폴리오 안에서 AI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를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그 어떤 나라보다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새 정부에게 바라는 모습은.

“매번 정부가 기업들을 불러다 회의를 한다. 만약 워싱턴에서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불러 모으면 오나?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기초 과학 발전과 같이 나중에 기업이 가져다 쓸 씨앗을 심는 것, 차마 기업이 신경쓰지 못하는 영역을 먼저 나서 열심히 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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