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겁이 없다. 살아가면서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날 때부터 강심장이어서가 아니라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왔기 때문이다.”(책 ‘이재명은 합니다’ 중에서)
밑바닥에서 출발한 소년공 이재명은 6월 4일 49.29% 득표율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41.15%)를 따돌리고 6·3대선에서 승리했다. 1728만7513표를 받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역대 최다 득표수를 기록했다. 대한민국 권력 정점에 오르기까지 이재명 대통령의 삶은 숱한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했다. 흙수저로 태어나 사법시험 합격, 세 번의 대권 도전 끝에 대권을 거머쥔 이 대통령의 삶은 그가 밝힌 대로 겁 없는 여정 그 자체였다.
흙수저에서 변방 정치인으로
이재명 대통령이 대양실업 공장에서 소년공으로 일하던 시절 모습. 동아DB범여권 190석을 등에 업은 이 대통령은 ‘87체제 이후 가장 강력한 대통령’이다. 하지만 인생 초창기와 성장기에는 비주류 중 비주류였다. 이 대통령은 1963년 경북 안동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매일 입에 풀칠할 것을 걱정해야 했던 이른바 ‘흙수저’였다. 이 대통령은 스스로 “참혹하다”고까지 표현했던 가난과 싸웠고,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한 채 소년공 시절을 시작했다. 프레스기에 왼쪽 손목 관절이 눌려 비틀리는 사고를 당하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 대통령은 고교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하루 2시간씩 자면서 공부해 중앙대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두 번의 도전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 대통령은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인권변호사의 삶을 시작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이천·광주 노동상담소’에서 일하는 등 소년공 경험을 살려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2004년 시민들의 뜻을 모아 성남시립의료원 설립을 위한 주민 조례를 발의했으나 시의회에서 무산되자 그는 성남시장이 돼 자신의 뜻을 관철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변방에서 시작한 정치 도전 역시 쉽지 않았다. 2006년 지방선거와 2008년 총선에서 연이어 낙선했다. 2010년 두 번의 도전 끝에 성남시장에 당선해 선출직 공무원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릴 적 겪었던 가난과 비주류 정체성은 성남시장 시절 실행한 청년배당과 지역화폐 제도 등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금융 정책을 세우는 데 영향을 끼쳤다.
두 번의 탄핵이 만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이 30대 시절 변호사로 일하던 모습. 동아DB.변방의 정치인이던 이 대통령이 전국구 단위 정치인이 된 것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뒤다.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 대통령은 그해 10월 29일 제1차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퇴진”을 가장 먼저 주장했다. 여론의 주목을 받아 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2위까지 올랐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19대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21.2% 지지율을 획득하며 1위 문재인 전 대통령(57%)과 2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21.5%)에게 밀렸다.
이 대통령은 19대 대선 이듬해 치른 2018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당선했다. 이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2020년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후 정치적 행보에 탄력이 붙어 2022년 20대 대선에 다시 한 번 민주당 후보로 나섰으나 윤석열 전 대통령과 맞붙어 0.73%p 차로 낙선한다.
2022년 대선 과정에서 이른바 ‘대장동 게이트’가 터져 나왔고 윤 전 대통령 당선 이후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다시 한 번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2023년 2월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넘어오자 이 대통령은 부결을 호소했지만 ‘비명’(비이재명)계 의원들의 이탈로 가결되기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흉기에 목을 찔리는 피습사건을 겪기도 했다. 정치적·신체적 위기를 모두 넘긴 이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 자리에 올라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민주당 의석만 175석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둔다.
지난해 12월 3일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사태는 이 대통령의 대권 가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 전 대통령의 불법계엄 선포 이후 이 대통령은 재빨리 국회로 이동하며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켜고 국민을 향해 “국회 앞으로 모여달라”고 호소했다. 국회의사당 입구가 봉쇄되자 그는 담장을 넘어 국회 안으로 들어가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대선 경선에서 89.77%라는 압도적 결과를 얻은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과 새로운 대한민국 회복”이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기초지자체장에서 권력 정점에 오르는 동안 이 대통령은 자신이 비주류, 아웃사이더, 변방임을 자처했다. 그 과정에서 ‘싸움닭’ ‘사이다’ 같은 별명을 얻었다. 기득권에 대한 반발심 및 투사 기질로 국민 통합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우려와 소외 경험으로 국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기대가 동시에 나온다. 현재 법원에서 8개 사건, 12개 혐의로 5건의 재판이 진행 중인 점도 신임 대통령에게 따라붙는 꼬리표다.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적 토대 사법연수원 ‘노동법학회’
이재명 대통령이 1989년 사법연수원 수료 당시 찍은 사진. 이재명 캠프 제공이재명 대통령은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7년 사법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져 민주화 물결에 횃불이 당겨진 시기였다. 연수원에서의 2년간 경험은 그의 인생 중반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당시 사법연수원에는 비공식 기수 모임이 있었다. 회원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여 주로 시국과 사회변혁을 의논하는 일종의 언더서클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모임에 참여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수많은 불이익을 당해본 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책 ‘이재명은 합니다’ 중에서)
이 대통령은 연수원 시절 ‘노동법학회’로 불리는 서클에 참여해 노동운동단체나 인권단체 등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함께 6월민주항쟁에 참여하고 5·18 묘역을 참배하기도 했다. 이때 만난 인연(사법연수원 18기)은 이 대통령의 정치 인생에서 핵심적인 기반이 됐다. 38년 지기로 불리는 민주당 정성호 의원이 대표적이다. 문병호·최원식 전 의원과 문무일 전 검찰총장,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도 노동법학회 소속이었다.
1988년 노동법학회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기승 대법원장 지명에 반대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 대통령은 “연수생들도 자치회 차원에서 집단서명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려 했지만 연수원 측이 또다시 제지했다”며 “그날 저녁 봉천동 여관에 문무일, 최원식 등 몇몇 연수생이 다시 모여 밤을 새우며 토의 끝에 반대 서명을 다시 하기로 결의했다”고 웹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사법연수생 185명의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고, 법원 판사들도 새로운 대법원 구성을 요구하며 집단 성명을 발표하는 ‘2차 사법파동’이 일어난 끝에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됐다.
이 대통령이 인권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연수원 시절 들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 변호사)의 강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연수원 시절 출세가 보장된 판검사의 길과 변호사 개업 사이에서 고민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강연에서 “하고 싶은 일을 용기 있게 해라. 변호사 내가 해보니까 절대로 안 굶는다”고 말했고, 이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를 선택한다. 올해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를 맞아 봉하마을을 방문하기 전 이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기득권에 맞서며 편견의 벽 앞에서 포기하지 않던 노무현의 꿈, 지역주의와 특권의 장벽을 넘은 민주주의라는 큰 꿈을 이제 제가 이어가려 한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