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직장인들 사이에서 생활비를 한 푼도 쓰지 않는 ‘무지출 챌린지’가 유행한 게 3년 남짓이지만, 일본에서는 2000년대부터 일찌감치 극단적인 절제 소비가 두드러졌다. 버블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소비를 가치 없는 행동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죄악시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화장품에 1000엔 넘게 쓰거나 새 차를 사는 사람은 바보”라는 인터뷰 기사가 넘쳐났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가성비인 ‘코스파(cost performance의 일본식 발음)’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소비 대신 절약이 일상이 된 일본의 30여 년간 변화를 한국은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듯하다. 한국인 전 세대가 10년 전에 비해 소비를 자제하며 지갑을 닫았다고 한다. 세금, 이자, 연금보험료 등을 내고 남은 가처분소득에서 소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인 ‘평균소비성향’이 모든 연령층에서 10년 전보다 하락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14년과 2024년의 세대별 소득과 소비 지출 변화를 분석한 결과다.
▷연령대별로 보면 60대의 평균소비성향이 62.4%로 내려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100만 원을 벌면 62만 원 정도만 썼다는 얘기다. 또 소득이 늘어난 다른 세대와 달리 20, 30대는 소비금액뿐만 아니라 가처분소득까지 동시에 뒷걸음쳤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젊은층은 쓸 돈이 없어 지갑을 못 열고, 준비 없이 은퇴를 맞은 고령층은 노후가 막막해 지갑을 안 여는 것이 통계로 확인된 셈이다. 전 연령층의 소비 감소는 단순히 경기 둔화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총체적으로 맞물린 결과다.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산·고령화로 저성장이 만성화되는데, 성장 활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은 더디기만 해 일본식 극단적 절약 소비가 고착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1년 늘어날 때마다 평균소비성향은 0.48%포인트씩 하락한다고 추산했다. 한국인 기대수명이 2004년 77.8세에서 지난해 84.3세로 뛰었는데, 그만큼 길어진 노후에 대비하기 위해 30, 40대마저 저축은 늘리고 씀씀이를 줄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비 부진은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침몰을 더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0.8%로 대폭 낮추고 ‘0%대 성장’을 공식화하면서, 민간소비가 성장률을 0.15%포인트 끌어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국민이 지갑을 닫는다는 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크다는 뜻이다. ‘피크 저팬’에 이어 ‘피크 코리아’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판에 무차별 돈 풀기식 정책만으로는 닫힌 국민들의 지갑을 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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