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5000원에 인생 노고 달래는 인심 좋은 한상차림[김도언의 너희가 노포를 아느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5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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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옥돌구이 한정식’의 1인분 기준 1만5000원짜리 한상차림. 김도언 소설가 제공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옥돌구이 한정식’의 1인분 기준 1만5000원짜리 한상차림. 김도언 소설가 제공
김도언 소설가
김도언 소설가
외국 음식과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한식의 특징은 뭘까 생각한 적이 있다. 외국 친구들의 이야길 들어보면 무엇보다 밥상에 함께 나오는 더할 나위 없이 다양한 찬의 가짓수다. 그들 눈에는 그 찬들이 하나하나 고급스러운 일품요리처럼 보인다고 한다. 서양에도 에피타이저나 디저트처럼 절차적 형식에 따라 음식에 개별적 의미를 부여하는 전통이 있긴 하다. 하지만 정말 무차별적으로, 전폭적으로 상 위에 올려지는 한식 식단의 압도적인 풍성함 앞에선 외국인들도 즐겁게 기함할 수밖에 없다. 우리말에 ‘한상차림’이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도 제대로 차려 먹는 한정식은 여전히 쉽게 접하기 어렵다. 거개가 예와 격을 갖추는 자리에서나 선택되는 게 한정식이다. 가격 또한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으로 형성돼 있어 일반 서민들은 연중 손에 꼽을 정도로나 맛볼 수 있다. 필자가 대략 알아보니 서울 인사동이나 강남의 유명한 한정식집 1인분 가격은 5만∼9만 원 선에 형성돼 있다. 전복구이나 간장게장, 소불고기, 떡갈비구이 같은 메인 메뉴와 찬의 가짓수에 따라 한정식은 차등을 두고 차려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한복판에, 놀랄 만한 한정식을 맛볼 수 있는 집이 있다. 40년간 식객들에게 밥을 내어왔다는 전북 군산 출신 60대 후반의 여사장님이 운영하는 이 집에서는 단돈 1만5000원에 제철 재료로만 만든 20가지가 훌쩍 넘는 반찬을 맛볼 수 있다.

나열해보면 돌나물, 궁채나물, 시금치, 콩나물, 숙주나물, 미나리, 무순 등 신선한 채소로 만든 감칠맛 나는 나물 무침과 각종 장아찌류가 차례차례 상에 깔린다. 여기에 미역줄기, 햄과 소시지, 어묵, 꽈리고추멸치, 메추리알, 두부와 호두를 넣은 조림과 볶음류가 뒤따른다. 그뿐인가. 기막히게 맛이 든 오이김치와 총각김치, 그리고 사장님의 고향이 호남임을 떠올리게 하는 삭힌 홍어회까지 함께 나온다. 이 집 한정식의 메인 메뉴는 옥돌에 구운 소불고기인데, 쌈 채소와 함께 국물이 없으면 섭섭할까 봐 깊고 시원한 육개장도 곁들여 나온다. 이런 음식을 눈앞에서 받고 있으면, 조금 과장해 말해 온 생애 동안의 애달팠던 노고가 보상받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이 집은 찬을 담는 종지도, 깨작거릴 때나 쓸 만한 작은 걸 쓰지 않는다. 1인이 가도, 2인이 가도 찬은 한 종지에 3, 4인분 양으로 푸짐하게 담겨 나온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정답은 정직하게 좋은 재료를 쓰되 가격 부담을 낮춰 박리다매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문이 이미 자자해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이고 단체 손님 예약이 줄을 잇고, 점심과 저녁 피크타임에는 웨이팅이 기본이다. 운이 없으면 입장도 못 하고 그냥 발길을 돌려야 할 정도다.

식사하는 동안 식재료를 떼어오는 거래처와 통화하는 이 집 사장님의 투박하면서도 정감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내용을 앞뒤 자르고 받아 적으면 이렇다. “그럼 제일 큰 걸로, 제일 좋은 걸로 한 박스 가져다줘봐요.” 한정식에 대한 통념을 바꾸고 있을 게 사장님의 이런 마음일 것이다. 제일 크고 좋은 것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먹이고 싶은 마음. 저 석양 지는 군산 앞바다만큼이나 따뜻하고 거룩한 마음.

#한식#한정식#찬#제철 재료#소불고기#외국인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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