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권주가[이준식의 한시 한 수]〈319〉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5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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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술잔, 호박빛 짙은 술, 작은 술통에서 떨어지는 진주빛 붉은 술방울.

용을 삶고 봉을 구우니 옥 같은 기름이 자글자글,

비단 휘장 수놓은 장막에 감도는 향긋한 바람.

용 문양 피리를 불고 악어가죽 북을 치면, 하얀 이의 미녀는 노래하고, 가는 허리 미녀는 춤을 춘다.

하물며 푸른 봄날 해는 저물어가고, 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처럼 떨어지거늘.

그대여 종일토록 흠씬 취하세. 주신(酒神) 유령(劉伶)조차 그 무덤까지는 술이 못 따라간다네.

(琉璃鍾, 琥珀濃, 小槽酒滴真珠紅. 烹龍炮鳳玉脂泣, 羅幃繡幕圍香風. 吹龍笛, 擊鼉

鼓, 皓齒歌, 細腰舞. 況是青春日將暮, 桃花亂落如紅雨. 勸君終日酩酊醉, 酒不到劉伶墳

上土.)

―‘술을 권하다(장진주·將進酒)’ 이하(李贺·790∼816)


꽃비 흩날리는 봄날, 굳이 권주가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풍성한 술자리가 펼쳐진다. 명주와 명품 기물, 진귀한 안주, 미녀의 가무가 어우러졌으니 ‘종일토록 흠씬 취하자’는 제안을 상대도 쉬 거절하지 못할 듯하다. 하나 이 시의 정취는 단지 향락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저무는 봄날을 빌려 청춘의 쇠락과 인생무상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술 좋아하던 유령 같은 이도 무덤에 묻히면 술과의 인연은 끝이라는 살뜰한 배려까지.

스물일곱 나이에 요절한 시인은 왜 이런 권주가를 읊었을까. 인생의 절정기에 ‘노세, 젊어서 노세’ 식의 향락주의를 표방했을 것 같진 않다. 혼란의 시대 미관말직을 전전했던 울분을 삭이려는 자기 위안이었는지 모른다. 몽롱하고 화려한 어휘, 기발한 이미지로 감각을 자극하던 시인의 미학적 취향이 여실히 드러난다.

#유리 술잔#호박빛 술#진주빛 술방울#용 문양#비단 휘장#향긋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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