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임우선]뉴욕 빌딩숲 내려앉은 석양 ‘맨해튼헨지’… 거리의 과학 축제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15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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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발길 멈추게 한 ‘천문쇼’
1년에 두 번, 도심 가로지르는 석양… 맨해튼 주요 명소마다 시민 몰려
美자연사박물관 소개로 입소문 타… 천문학자-시민 함께 만든 과학 축제
트럼프 행정부, 예산 줄여 과학계 위기… 시민과 함께하는 과학 전통 위축 우려

11일 오후 미국 뉴욕 맨해튼 79번가 고층 건물 사이 도로와 석양이 가깝게 겹치는 이른바 ‘맨해튼헨지’ 현상이 나타나자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춘 채 일제히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11일 오후 미국 뉴욕 맨해튼 79번가 고층 건물 사이 도로와 석양이 가깝게 겹치는 이른바 ‘맨해튼헨지’ 현상이 나타나자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춘 채 일제히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임우선 뉴욕 특파원
임우선 뉴욕 특파원
《11일 오후 8시(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79번가. 어디선가 나타난 수백 명의 뉴욕 시민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서쪽을 향해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통제된 차도 위를 가득 메운 인파는 하늘을 향해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슷한 광경은 맨해튼 여기저기서 목격됐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근처 34번가, 크라이슬러 빌딩 근처의 42번가를 비롯해 14번가, 57번가 등 맨해튼 곳곳 여기저기서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마치 홀린 듯 도로로 걸어 나와 서쪽 하늘을 쳐다봤다. 도로 정중앙을 점령한 시민들에게 경적을 울리던 운전자들도 이내 포기한 듯 함께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8시 20분, 꼬마들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거리를 메운 사람들은 탄성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서쪽 지평선을 향해 지던 붉고 거대한 석양이 맨해튼의 격자무늬 도로와 정확히 일직선을 이루며 빛을 뿜어내는 장관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연신 하늘의 장면을 찍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위로 밝은 선홍색 빛이 비쳤다. 이것이 1년에 단 이틀만 볼 수 있는, ‘여름 맨해튼의 천문학 파티’라는 별명이 붙은 ‘맨해튼헨지’의 모습이었다.

● 도시로 들어온 천문학 파티

영국 남서부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 유적. 
픽사베이 제공
영국 남서부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 유적. 픽사베이 제공
맨해튼헨지는 영국의 선사 시대 유적지인 ‘스톤헨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선사 시대 사람들이 거대한 수직 암석을 세워 놓고 그 틈을 통해 하늘의 변화를 관찰했듯, 맨해튼에 세워진 초고층 빌딩들 사이로 여름 태양의 변화를 관찰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맨해튼헨지는 정확히 가로세로 90도의 격자무늬로 설계된 계획도시인 맨해튼의 동서 거리에 태양이 지평선과 맞닿으며 정확히 일직선으로 비추는 날을 의미한다. 1년에 단 두 번, 대략 하지 전후 20일쯤인 5월 말과 7월 중순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매년 조금씩 바뀐다.

이를 계산해 공표하는 건 ‘맨해튼헨지 계산가’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뉴욕 미국자연사박물관의 천문학자 재키 파허티 박사다. 그는 매년 그해의 정확한 맨해튼헨지 날짜와 시간을 계산해 공개한다. 11일 맨해튼헨지 관측 현장에서 만난 뉴요커 케일럽 씨는 “매년 뉴스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되는 맨해튼헨지 날짜를 캘린더에 적어놓고 그날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도심 곳곳에 서쪽 하늘을 관찰하기 위해 멈춰서는 인파가 워낙 몰리다 보니 일부 도로는 아예 뉴욕 경찰이 ‘관측용’으로 차량 운행을 통제하고 시민들에게 차도를 내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시민들이 ‘인생샷’을 찍기 위해 통제되지 않은 차도 중앙까지 점령하다 보니 맨해튼헨지가 있는 날 저녁 도심 일대는 잠시 아수라장이 된다. 하지만 좁은 빌딩 숲길 끝에 석양이 나타났다 사라지기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데다가, 모두가 일몰의 경이로움에 빠져 있다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는 온 도시가 함께하는 천문학 파티 같은 느낌을 준다.

● 시민에게 다가간 천문학자들

사실 뉴욕에 맨해튼헨지라는 용어와 현상이 나타난 것은 채 30년이 되지 않았다. 맨해튼의 격자무늬 도시 설계가 18세기에 완성됐다는 점, 또 태양이 과거부터 계속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교적 짧은 역사인 셈이다.

이날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맨해튼헨지 설명에 나선 파허티 박사는 “맨해튼헨지라는 용어는 1997년 박물관이 발행한 잡지의 만화에서 처음 언급됐다”며 “2002년 천체 물리학자인 닐 더그래스 타이슨 박사가 처음으로 맨해튼 빌딩 숲 사이에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설명했고, 그가 (정식으로) 맨해튼헨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했다. 미국자연사박물관 산하 헤이든 천문관의 관장이기도 한 타이슨 박사는 세계적인 천문 자연과학 분야 고전인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 박사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한때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으로 분류됐던 명왕성을 왜행성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제안해 실제 이를 인정받고 명왕성을 태양계 행성에서 제외시킨 학자이기도 하다.

파허티 박사는 “2002년 1월 1일 내추럴 히스토리 매거진 특별판에 34번가에서 찍은 맨해튼헨지 사진이 처음 실렸는데 이땐 거의 아무도 이 현상을 몰랐다”며 “하지만 2010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첫 대중 프로그램을 연 이후 갑자기 폭발적으로 관심이 늘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입소문을 통해 뻗어갔다”고 말했다. 학자들의 아이디어와 박물관의 대중화 노력에 뉴욕의 수많은 시민들이 천체에 관심을 갖고 하늘을 쳐다보게 된 것이다.

실제 박물관은 이날도 맨해튼헨지를 기념해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고 쉽게 천문학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대중 강연을 열었다. 설명자로는 파허티 박사가 직접 나섰다. 그는 맨해튼의 3차원(3D) 실제 영상과 태양의 궤적을 담은 3D 우주 영상을 활용해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맨해튼헨지의 과학적 현상을 설명했다. 또 강당을 가득 메운 시민들에게 “이 3D 영상은 박물관이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함께 개발한 ‘오픈 스페이스’ 우주 시각화 툴을 활용해 만든 것”이라며 “누구나 내려받아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여러분도 도전하고 만들어 보라”고 독려했다. 부모와 함께 강당을 찾은 아이들의 눈에서 과학과 우주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동경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 트럼프 위기 맞은 미 과학계

그간 미국 과학계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과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대중화의 균형을 잘 이뤄 왔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는 ‘과학기술 강국’ 미국을 만든 핵심 이유 중 하나로도 꼽혔다. 하지만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과학계에 대한 각종 정책 변경과 예산 삭감, 데이터 삭제 등이 진행되고 있다. 당연히 과학계의 비판과 우려는 커지는 모양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대통령 행정명령과 정부효율부(DOGE)의 정부 구조조정 추진에 따라 과학, 교육, 보건, 기후 등 분야에서 인력과 예산을 감축하고 8000개의 관련 웹페이지를 삭제했다. 또 미국 과학자들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연구 기반이 됐던 3000건 이상의 데이터세트 또한 삭제했다. 미국 및 세계 각국 대학의 과학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NASA,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립과학재단(NSF), 해양대기청(NOAA), 식품의약국(FDA), 국립기후평가(NCA) 등 미국의 관련 기관 전반이 영향을 받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특히 최근 미국에서 3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텍사스주 홍수로 인해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화석 연료 지지자인 트럼프 대통령이 기후 분야에서 삭감한 인력과 예산이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후 연구 지출을 동결하고 정부 과학 인력을 감축한 것은 이미 많은 기후 과학자들에게 불확실성으로 눈앞에 다가왔다”며 “저명한 과학자들조차 막다른 길에 봉착하고 있으며, 대중이 기후 과학에 대해 알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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